‘지식의 역설’이라는 개념이 있다. 지식을 쌓을수록 더 많이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모르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식으로 말하자면 무엇을 모르는지 알게 되는 ‘무지(無知)의 지(知)’를 실감하는 상황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런 상황은 아무런 노력 없이 자연스레 경험하기는 어렵다. 지식의 역설을 실감하고 더 성장하려면 부단한 성찰과 인정의 과정이 이어져야 한다.
하지만 대개는 특정 업계에 오래 몸담을수록, 혹은 나이 들수록 ‘더 많이 안다’는 확신에 의지하게 된다. 건강한 확신은 자신감으로 이어질 수 있으나, 무지를 외면한 반쪽짜리 확신은 오만함으로 변질된다. 우리 사회에 ‘꼰대’가 넘쳐나는 것도 결국 ‘내가 더 많이 안다’는 착각(스스로는 확신이라 믿는)에서 비롯되는 것 아닌가.
그런 점에서 서른 중반이라는 시기는 참으로 애매하다. 청춘이라기엔 민망하고 중년이라기엔 설익었다. 사회학적 정의에 기대면 MZ 세대에 속하기는 하지만, 나를 MZ 세대라고 부르는 건 적어도 50대 이후의 어르신들뿐이다. 정작 10대, 20대에게 서른 중반의 남성이란 호의적으로 봐줘야 삼촌이고, 세대 차이 나는 아저씨에 불과하다. 그들과 한 끗의 의견 차이만으로도 쉽게 꼰대가 되기 쉬운 시기이기도 하다.
때문에 서른 중반에는 누구에게든 배우려는 자세가 절실하다. 위로는 업계의 베테랑 선배들, 삶의 멘토가 되어줄 어른들을 찾아야 한다. 대단한 기술을 전수받지 않더라도, 어깨너머로 그들의 삶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배울 점이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그들을 통해 ‘나의 무지’를 매 순간 깨달으면서 겸손함을 상기하고, 성장 의욕을 고취할 수 있다. 내게는 책 『말과 태도 사이』를 집필한 유정임 작가님이 그런 존재다. 스물여덟에 처음 라디오 작가 활동을 시작했던 때, 내가 맡은 프로그램의 DJ이자 제작국장이었던 분이다. 그분에게서는 현재에 안주하지 않는 에너지, ‘화려한 경력’이 아닌 ‘현재의 능력’을 자신감의 원천으로 삼는 자세, 권위적인 언어 없이도 품위를 잃지 않는 말을 배웠다.
한편 서른 중반은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다’는 말을 변명 삼아 속물이 되기 쉬운 시기이기도 하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련의 노력은 그 자체로 숭고하기도 하지만, 조금만 방심하면 몇 푼 돈에 눈이 멀어 교양을 잃고 본질을 호도하기 쉽다. 그럴 땐 청춘과 유년으로부터 배우는 것이 효과적이다. 20대의 패기와 10대의 무모함, 어린이의 순진무구함이 카페인보다 더 정신을 번쩍 깨우는 자극제가 된다. 그들과 다르지 않았던 내 지난날을 마주하고, 잊고 지내던 동심을 목격하는 것만으로도 탁했던 마음이 정화되는 것이다. 그래서 가끔 속물이 되어버린 것 같은 날엔 김소영 작가의 에세이 『어린이의 세계』를 읽으며 마음을 가다듬는다. 물론 내게 가장 큰 울림과 위안을 주는 어린이는 두 조카들이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했던 신생아 때부터 우리 부부는 가능한 한 많은 시간을 조카들과 보내기 위해 노력했다.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조카들의 모든 순간이 아쉬웠다. 그러는 동안 조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어른, 무엇이든 좋은 것을 전해줄 수 있는 이모와 이모부가 되어야 한다는 의식이 우리 부부를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왔다고 생각한다. 무언가를 더 가르쳐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조카들을 보러 가지만, 늘 배우고 돌아오는 건 오히려 우리였다. 그들의 동심, 그들의 진심, 심지어 그들의 의문까지도 어른이 되어버린 나에겐 신선한 자극이었다. 그중에서도 매년 연말이면 꺼내어 곱씹는 조카의 말이 있다. 2020년 12월 31일, 해가 바뀌면 여섯 살이 되던 첫째 조카가 ‘다섯 살의 자신’에게 건네는 인사말이었다.
“이제 우리는 영원히 못 보지만 다음에 또 만나. 그동안 너가 나여서 고마웠어. 많이 즐거웠어. 사랑해.”
이 말을 곱씹을 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한 살씩 나이가 늘 때마다 과거의 나를 한심하게 여겼던 내 모습을. 새해에는 꼭 잘살아보자, 꼭 다이어트에 성공해보자, 돈을 많이 벌어보자 외치면서 그러지 못했던 과거의 나를 부정했던 마음을. 삼십여 년을 그런 방식으로 ‘과거의 나’와 이별해왔던 과정을. 따지고 보면 ‘지금의 나’는 하루아침에 뚝딱 생겨난 것이 아니라, 무수한 ‘과거의 나’와 함께 일구어 온 존재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애써 살아낸 ‘과거의 나’를 한심하게만 여기는 건, 꽤 오만하고 뻔뻔한 처사가 분명하다.
여섯 살이 되던 조카가 자신의 다섯 살과 이별했던 방식처럼, 나도 매년 ‘과거의 나’와 다정하게 이별해야 한다는 걸 배웠다. 조금 아쉽고 모자란 점이 있었어도, 아무튼 지난 1년 동안 너가 나여서 고마웠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결국 자신의 과거를 사랑하는 사람만이, 미래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