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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빈 Feb 02. 2018

오래된 아파트의 흰 문턱

치이고 미움받으면서도, 문턱은 거기 있었다

시집 <다시, 다 詩>  '문턱' 中



 굳이 신축이 아니더라도, 요즘 대부분의 아파트에는 문턱이 없다. 미관상의 이유도 있을 것이고, 사실 그리 실용적이지 않은 것이기도 하다. 문턱이 있으면 바닥 작업을 하기도 번거롭고, 또 어린 아기가 있는 가정에서는 위험의 요소가 되기도 한다. 무엇보다 나에겐, 선잠을 깬 새벽 방을 나서다 문턱에 발가락을 부딪혀 속으로 억억대며 나뒹군 적이 여러 번 있기에, 문턱은 여러모로 없어질 만한 것이다.


 중학생 시절부터 불과 몇 년 전까지, 우리 가족은 꽤 오래된 6층 아파트에서 살았다. 굉장한 오르막길에 단지가 있는 데다가, 엘리베이터도 없었다. 제일 윗동에 제일 위층이었던 탓에 여름과 겨울마다 귀갓길이 고역이었다. 물론 큰 도로와 떨어져 있고, 베란다 앞으로 푸른 산자락이 누워있는 점은 나름의 장점이었다. 창을 열어두면 상쾌한 공기가 집안에 머물렀고, 비라도 오는 밤이면 개구리울음소리가 도록, 도록 굴러오는 집이었다. 


 그리고 그 아파트에는 방마다, 문턱이 있었다. 나무에 흰 페인트칠을 한 문턱이었다. 자주 페인트칠이 벗겨지곤 하는 문턱이었고, 앞서 말한 것처럼 종종 새벽에 발가락을 부여잡고 뒹굴게 만든 문턱이었다. 만취한 아버지 속에 끓는 응어리를 참지 못하고 방문을 내던지듯 닫으실 때에 그 마음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자리를 지켰던 것이 문턱이었고, 그런 날 새벽이면 이따금씩 눈물을 훔치던 어머니가 주저앉은 자리가 문턱이었다. 그러면서도, 밟으면 복 나간다는 옛말 때문에 분명히 있으면서도 없는 존재인 듯, 무시하듯 넘어가기만 했던 것이 그 희고도 서러운 문턱이었다.


 어느 새벽, 어김없이 물 마시러 방을 나서다 문턱에 발가락을 부딪혀 나뒹굴었던 날. 조금씩 페인트칠이 벗겨진 흰 문턱이 문득 서러워 보인 적 있다. 제 몸 바쳐 누운 자리가 외로워 보인 적 있다. 문턱은 소중하지만 잊힌 것들을 떠올리게 했다. 발가락을 부여잡고 속으로 억억대는 나를 보며, 가끔 그렇게 외상 없는 지독한 저릿함으로 앓아보라고, 앓으며 잊지 말라고 말하는 듯했다.



문턱


요즘은 없는 집도 많지만

우리 가족 살고 있는 이십몇 평 헐거운 아파트에는

방방마다 아슬한 경계마다 문턱이

문턱이 누워있다.

몇 번 흰 페인트를 덧칠한 문턱은

방문보다도 더 강직하게 자리를 지키며 있는데도 

가족 중 누구 하나 방을 드나들며 

문턱을 보듬을 줄 몰랐다.


지조 없이 팔랑이며 열렸다 닫히는 

방문의 발목을 끌어안고 있는 것이 문턱인 줄을 모르고

만취한 아버지 나 태어나기도 전부터 

곰삭은 설움으로 애먼 방문을 밀어붙일 때

쾅쾅, 울리는 그 소리가 문턱의 신음인 줄도 모르고


문득 잠에서 깬 새벽 

식혀둔 보리차 마시러 방을 나서다

내 발에 차인 문턱이 하얗게 울고 있다

가족들이 깰까 봐 소리를 억억 삼키며

새끼발가락을 부여잡고 뒹구는 

단단하고 치명적인 외로움의 시간

내가 모른 체하고 지나온 소중한 것들이 

저 흰 문턱에 누워 있다.


가끔 이렇게 외상 없는 

지독한 저릿함으로 앓아보라고,

앓으며 잊지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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