팥을 좋아하면 어른이 되어가는 걸까
술이나 담배, 복권처럼 즐기는 데에 연령 제한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음식도 맛에 따라 ‘아이’의 음식과 ‘어른’의 음식으로 나뉘곤 한다. 주로 직설적이고 단순하고 자극적인 맛을 지닌 음식을 아이의 음식, 미묘하고 복합적이고 여운이 남는 맛을 지닌 음식은 어른의 음식이라고 하는 것 같다. 가리는 음식이 워낙 많은 나는 성인이 된 지 한참이 지난 아직도 ‘아이 입맛’을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래도 조금씩, 조금씩 ‘어른 입맛’을 배워가는 중이다.
그런 ‘어른 입맛’, ‘어른의 음식’ 하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나는 ‘팥’이 퍼뜩 떠오른다. 어르신들이 으레 팥을 좋아하시기도 하지만, 우선 우리 아버지가 팥을 굉장히 좋아하신 탓이다. 글을 쓰는 김에 ‘정말 그러셨던가?’ 싶어 하나, 하나 짚어보니 아버지의 팥 사랑은 더욱 확실해졌다.
아버지는 아이스크림을 드실 때에도 꼭 팥이 들어간 걸 고르셨다. 비비빅을 가장 선호하셨고 그 외에도 아맛나, 빙빙, 붕어 싸만코 같은 것들을 드셨다. 아마 얼마나 팥이 많이 들어갔느냐가 선호도에 큰 영향을 미친 것 같다. ‘아니, 바닐라나 초코, 캐러멜 같은 달달한 맛 때문에 아이스크림을 먹는 건데, 웬 팥?’ 사실 지금은 나도 아버지의 아이스크림들을 좋아하지만, 어린 시절엔 늘 의문스러웠다. 혹시, 자식을 위해 생선의 맛도 없고 살도 없는 부위를 드시던 부모님의 마음일까. 아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팥 아이스크림을 드실 때의 그 행복한 표정은, 진심이었다.
아버지는 팥죽도 좋아하셨다. 나는 팥죽을 먹더라도 기왕이면 단팥죽으로, 그것도 가능한 많이 달달한 것으로 먹는 편이었는데 아버지는 일단 팥죽이기만 하면 오케이셨다. 하기야, 거의 팥으로만 쑨 죽이 팥죽인데, 싫어하실 리가 없었겠지. 한참 우유 빙수, 인절미 빙수가 유행하던 때. 그 부드럽고 달달한 맛에 우리 가족이 모두 푹 빠져 있을 때에도 아버지는 얼음 빙수에 팥을 가득 얹은 옛날 빙수를 고집하셨다. 요즘 빙수는 달기만 하고, 팥맛이 안 나서 빙수 같지가 않다고 하시면서.
이제 더 말 안 해도 눈치채셨겠지만, 아버지는 빵도 팥빵을 가장 좋아하셨다. 단팥빵이 최고였고, 영어 이름으로 된 신메뉴들은 잘 모르시더라도, 좌우지간 팥이 들어간 것이면 오케이셨다. 처음 보는 빵을 한 입 베어 물고서 뱉으시는 첫마디가 “이야, 팥이 들어가 있네.” 셨으니까. 어릴 적엔 그런 아버지를 볼 때마다 무슨 팥을 저리도 좋아하실까, 생각했었다. 열도 내려주고, 소화도 돕고, 당뇨에도 좋고, 비타민도 풍부하고... 팥 좋은 거야, 나도 잘 알지만 아무리 그래도, 저렇게까지!?
그런데, 이를 어쩌나. 아버지는 나의 아버지요,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니 언젠가 유전적 유사성이 드러나게 마련인 걸까. 어느덧 정신 차려보니 나도 팥 성애자가 되어 있었다. 한치 오차 없이, 아버지가 좋아하셨던 그 팥 아이스크림, 팥죽과, 옛날 팥빙수, 그리고 단팥빵까지. 먹어보니, 맛이 있다. 그것은 그냥 달거나 자극적인 맛은 아니지만 자꾸 곱씹게 되는 맛이고 입안에 남아 은은한 여운을 남기는 맛이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매번 아이스크림이니, 빵이니, 빙수니 하는 걸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너무 간식들이기도 하고, 살도 찌고, 또 팥 음식이라곤 하지만 당이 너무 많기도 하고.
매년 여름마다 그래 왔듯 올여름도 역대 최고 기온을 기록할 것이라고 한다. 올여름에도 우리 아버지는 팥 아이스크림과, 옛날 팥빙수를 찾으시겠지. 열대야가 심한 늦은 밤엔 엄마가 사다 놓은 단팥빵을 야식으로 드시겠지. 이왕 드실 거, 몸에 좋은 팥으로 드셨으면 좋겠다. 좋은 팥으로, 건강한 팥으로.
이 글은 칸투칸 8F 칼럼으로 최초 기고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