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물의 온도는 엄마의 온도
지금은 아버지께서 연세도 있으시고, 또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시기도 해서 그럴 일이 거의 없지만, 내가 고등학생일 때까지만 해도 ‘술 한 번 드셨다.’하면 늘 만취 상태로 귀가하셨다. 새벽 3시, 4시쯤까지 연락이 안 되다가 집 근처에서 구슬픈 노랫가락이 들려오면, 엄마가 나가서 아버지를 꾸역, 꾸역 끌고 들어오는 식이었다. 아버지에 대한 미움과 걱정, 사랑과 분노, 말 그대로 애증의 감정을 꾹꾹 눌러 삼키면서.
가끔은 함께 술을 마시던 친구 분의 전화로 늦은 귀가를 알리기도 하셨는데, 그 친구 분도 만취 상태이긴 매한가지여서 거의 대부분의 통화 내용이란 “제수씨! 잘 지내십니꺼!? 아이고.. 마, 우리가 술을 마시다가 쪼~까 늦었습니데이. 알지예? 내가 우바야하고(우리 아버지 별명이 ‘우바야’ 다.) 워낙에 할 말이 많아가...” 뭐 이런 식이었다. 그러니 우리 엄마 속이 뒤집히고 분통이 터질 수밖에.
내가 고등학생이 되고나서부터는, 아버지의 만취 귀갓길을 내가 담당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도 엄마가 걱정에 잠 못 드시는 건 매한가지였지만, 적어도 술에 듬뿍 젖은 솜처럼 무거워진 아버지를 부축해서 집에 들이는 일을 직접 하실 필요는 없게 되었다. 더불어, 아버지의 메인 주사인 ‘했던 말 또 하기’와 ‘인생과 철학에 관해 논하기’ 또한 내가 담당, 아니 ‘감당’하게 되었는데 최소 1,2시간 정도 진행되는 굉장한 주사였다. 그러니, 아버지가 만취한 상태로 귀가하는 날은 엄마는 분통 터져 못 자고, 나는 아버지 말동무되어 드리느라 못 자는, 그야말로 피곤한 날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라고 해서 피곤하지 않으실 리는 없었다. 생계를 위해 아침에 일어나 또다시 출근을 하셔야 했으니까. 나 또한 학교에 등교를 하려면, 만취한 아버지와 비슷한 시간대에 잠들었다가 늦어도 아침 7시엔 일어나야 했다. 차라리 밤을 새우는 게 덜 피곤할 것만 같은 아침. 뻐근한 몸으로 겨우 눈을 뜨고 일어나 방문을 열면, 주방엔 늘 작고 둥근 엄마의 뒷모습이 먼저 나와 있었다. 팔팔 끓인 뜨거운 물에 찬장에서 꺼낸 밤꿀을 숟가락으로 떠다 넣던 엄마의 뒷모습에는 늘 ‘미워도 다시 한번, 미워도 다시 한번’이 주문처럼 새겨져 있는 듯했다.
뒤이어 겨우 잠에서 깬 아버지는 일어나자마자 엄마가 말없이 퉁명스럽게 건네는 꿀물을 들이켜셨다. 미안함과 무안함에 무어라 말은 못 하고, 괜히 헛기침을 하면서, 뜨거운 꿀물을 후후 불어가면서. 그리고는 그 몸으로 또다시 직장으로, 생계의 전선으로, 현관문을 열고 나서곤 하셨다. 가슴과 뱃속에 뜨겁고 진한 꿀물의 온도를 품으신 채로.
나도 가끔 아버지의 특권처럼 여겨지던(!?) 꿀물을 마실 기회가 있었다. 미음도 삼키기 어려울 만큼 심한 몸살을 앓았을 때, 엄마는 뜨거운 물이나 데운 우유에 밤꿀을 타 주시곤 했다. 병으로 바닥난 체력을 빠르고 든든하게 채워주는 꿀의 당분이 온몸에 스스스 퍼지면, 어떤 감기약보다도 기분 좋은 회복의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가슴과 뱃속에 뜨겁고 진한 꿀물의 온도를 품은 채, 한숨 푹 자고 일어나면 한결 머리가 개운해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달고도 약간 쌉싸름했던 그 밤꿀의 맛은, 사실 회복과 치유의 맛이었다. 쓰린 속과 아픈 몸을 달래주는, 진득하고도 끈끈한 가족 간의 정을 닮은, 그런 회복과 치유의 맛. 그래서, 우리 집 부엌 찬장에 있던, 유리병 속의 진갈색 밤꿀이 조금씩 줄어든다는 건 누군가가 아팠다는 사실이면서 동시에 누군가가 회복했다는 증거였다.
본가에서 나와 부산으로 자리 잡은 내가 요즘 꿀을 먹을 일은 거의 없다. 딱히 꿀을 따로 챙겨 먹을 만큼 좋아하지도 않거니와, 만취한 아버지의 모습이 반면교사로 작용해 술을 많이 마시지도 않기 때문이다. 또 아프면 아픈 대로 꾸역, 꾸역 지내거나 정 힘들면 병원으로 직행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나마 가끔 꿀을 먹게 될 때라곤 여자 친구와 화덕 피자 가게에 가서 고르곤졸라 피자를 꿀에 찍어 먹을 때뿐이다. 물론 그마저도 천연 꿀은 아니다.
회복과 치유의 맛이 꿀의 맛이라면, 딱히 꿀이 필요하지 않은 삶은 꽤 괜찮다는 의미일까. 하지만 만취하지 않아도, 크게 앓지 않아도 상처받을 일은 많다. 막막한 대출금, 도전보다 체념을 익혀야 하는 삶, 직장 생활의 비애와 인간관계에서의 배신감, 보장되지 않는 노후까지. 그래서 사람들은 회복과 치유를 위해 여행을 가고, 무엇인가를 때려 부수고, 과식을 하고, 술에 취하고, 기어코 펑펑 울기도 한다. 그 사람들의 집, 부엌 찬장에 진한 갈색의 밤꿀을 놓아주고 싶다. 유리병에 담긴 밤꿀의 진득하고도 끈끈한 정을, 든든한 당분을 채워 넣고 싶다. 가장 간단하고도 확실한, 치유와 회복의 맛을.
딱히 아픈 데도 없이, 문득 엄마가 보고 싶다.
엄마가 타주는 꿀물 한 잔이 간절해지는 저녁이다.
이 글은 칸투칸 8F 칼럼으로 최초 기고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