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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빈 Feb 05. 2018

나이라는 게

서른엔 서른을 모른다.


서른이 찾아왔다.


서른이란 나이는 하루아침에 찾아왔다. 아니, 사실은 2017년 1월 1일부터 365걸음 거리에서 서른은 하루 한 걸음씩 찾아왔다. 2017년 12월 31일까지도 내가 모른 체하고 있었을 뿐. 서른이 ‘서러운 어른’의 준말이라는 말도 있고,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 노래의 첫 가사가 ‘또 하루 멀어져 간다’이기도 하지만, 정작 서른이 되어 보니 글쎄. 일단 나는 생각보다 서럽지 않았고, 어른은 더더욱 아니었다. 멀어져 가는 것들 많지만, 아직 다가올 것들이 더 많은 나이라는 생각이 든다. 선배들에게 얘기했더니, 나이 서른엔 서른이 실감이 안 난다고 하더라. 진정한 서른은 서른하나에 훅, 노크도 없이 들어올 거라면서. 역시, 나이라는 건 한 박자 늦게, 뒤돌아볼 때 가늠해볼 수 있는 건가.


다만, 나이 서른에 ‘꿈’에 대해 말한다는 게 조금 민망하긴 하다. 남들은 직장에, 연봉에, 차 할부금, 출산 얘길 하는데 나만 손에 잡히지도 않는 뜬구름 속에 머물고 있는 것 같아서. 그래도 어떡해, 난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돈도 벌고, 결혼도 하고 싶은데. 혹시 이러다가 나라는 사람이 아예 ‘민망한 놈’이 되어버리는 거 아닐까, 하는 걱정도 들지만 조금 더 뻔뻔해질 준비를 하고 있다.


어쩌면 나이라는 게

나이라는 게 막 던져둔 옷가지처럼 제멋대로 쌓이도록 놔두다가, 문득 고요한 날에 주섬주섬 개어보게 되는 것 같다. 그때가 되어서야 잃어버린 줄 알았던 양말 한 짝을 찾아내거나 구겨진 셔츠를 새삼스레 다림질해보기도 하듯, 나이라는 건 문득 어질러진 날들을 정렬하고 살펴보는 동안 차곡차곡 쌓이는 건 아닐까. 그래서, 사람은 앞만 보고 달릴 때보다 가끔 뒤를 돌아보며 지나온 날들을 곱씹어볼 때 조금씩 나잇값을 채워나가는 건지도 모르겠다.


대부분의 아들이라는 놈들이 그렇듯, 그리고 맏이라는 놈들이 그렇듯 나도 부모님께 그리 살가운 자식은 아니었다. 크게 부모님의 속을 썩이는 짓을 한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딱히 내 속을 털어놓지도 않아서 오히려 매정하고 어려운 아들이었을지도 모른다. 요즘은 내 나이를 때때로 실감하면서, 나도 모르게 부모님 어깨를 주무르고, 괜히 어깨동무나 팔짱을 끼거나 하게 된다. 사랑한다는 말은 스물일곱이 되어 처음 육성으로 내뱉었다.


삶은 늘 앎보다 늦어서


어릴 땐 어른에게 혼나서 서럽거나 억울할 때만 나던 눈물이, 어느 순간부터는 술 취한 아버지 피부에 손이 닿기만 해도 울컥 차오른다. 삶은 늘 앎보다 늦은 까닭에 소중하다고 배운 것들이 정말 소중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면, 삶은 무거워지고 눈물은 가벼워져서 잠깐만 휘청거려도 넘치는 탓이다. 바깥에 있는 것들을 안으로 담기만 하는 것이 눈인 줄 알고 살았는데, 이제야 내 안에서 넘쳐 나오려는 것들 닫아 잠그는 문이 또한 눈이라는 것을 삶으로 배운다.


그러나 아무리 사랑하고 아무리 소중해도 완전히 메울 수 없는 이해와 존재의 틈은 있는 법이라, 가족도 연인도 가끔 각자 외롭다. 요즘은 어쩌다 한 번 본가에 내려가서 부모님 사이의 그 틈에 끼어 지내는 것이 내 일이 되었다. 엄마는 엄마대로 공감하고 위로해드리고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존경하고 손 잡아드리면서, 종종 벌어지려는 그 틈에 끼어서 내 부피를 키운다. 그러고 나서 부산으로 돌아오면 혹시 그 틈에 찬바람이라도 불까 신경이 쓰인다.


기분 좋게 취하신 아버지와의 대화는 늘 나에게 문장을 남긴다. 내가 한동안 시를 쓰지 못했던 건, 아버지와의 대화가 없었기 때문인 줄도 모른다. 아버지는 젊을 땐 많은 것들을 아낄 줄 모르다가, 나이가 들면 별것까지 다 아끼게 되기도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다가 아비라는 이름이 인생을 대신하게 될 시기가 오면, 그때부터는 슬픔도 아끼게 된다고. 흥청망청 슬픔을 있는 대로 낭비해버리면 아비라는 존재가 부도날 수도 있다는, 가족이 폭삭 무너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라고. 세상에는 넘쳐도 될 것들보다 아껴야 할 것들이 더 많아서 눈물도 그렇게 빨리 멎어버리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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