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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빈 Feb 06. 2018

서른도 꼰대가 될 수 있다.

조심, 또 조심.

정신 차려보니 내가 꼰대라니.


 2015년 2월부터 ‘미래인 교육’이라는 독학재수학원에서 3년 동안 수능 국어 티칭 및 코칭을 맡은 적이 있다. 정신 차려보니 그래도 꽤 했다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1시간 수업만 하고 끝내는 강사보다, 여러 명의 학생들을 각각 1:1로 만나 하루에 2~3시간 이상 상담하고 설명하는 일이 인간적으로 더 많은 요건들을 필요로 했던 것 같다. 이제와 당시의 기억을 돌이켜 보면, 늘 ‘그땐 참 어설프고 부족했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특히 2015년에 날 처음 만났던 미래인 1기 학생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첫해의 난 정말 기술적으로는 ‘초짜’였다. 


 N수생 수험생들의 강사로 일하다 보니 학생들이 매달 치르는 모의고사를 함께 풀고, 분석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지난 5~10개년의 기출 중에서 학생들이 늘 질문하는 문제는 지문이 외워질 정도인 것들도 꽤 있었고. 나중엔 나름 요령이 생겨서 웬만한 것들은 다 질의응답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래서, 수능 국어의 ‘지식 전달자’ 측면에서는 나름의 노하우나 방법론이 조금씩 구축되었는데, 해가 거듭될수록 ‘상담자’ 측면에서 내 태도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해지더라. 


 우선 첫해 만났던 학생들에 대한 필요 이상의 (그러니까 내가 맡은 책임과 권한, 그리고 내가 받는 급여의 가치 이상의) 관심이나 애정은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사실 그건 의도적인 변화였는데, 너무 마음을 쏟고 나면 떠안지 않아도 될 심적 피로감이 크고, 또 막상 1기 학생들이 대학으로 떠난 뒤 12월과 1월에 느껴지는 허무함이 싫었기 때문이다. 또 어떤 학생들에겐 그런 방식이 오히려 부담이었을 수도 있었을 것 같고.


 사실 진짜 문제는 두 번째인데, 재수 혹은 대입이라는 상황 속에 있는 학생들을 반복적으로 만나다 보니 나도 모르게 학생들을 전형화, 유형화하여 인식한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비슷한 상황이라도 각 개인은 나름의 고민과 생각을 할 텐데, 마치 표준화된 대상을 판단하듯 쉽게 넘겨짚을 때가 종종 있었다. 이것이 아주 큰 문제인 이유는, 사람을 대상화하기 시작하면 개인에 대한 공감능력이 결여되고, 내 판단대로 규정짓고 조언하는 ‘꼰대 짓’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예민해져야 한다.


 그렇게 처음 학생들을 마주했을 때의 애정과 책임감보다는, 점점 생계의 수단으로만 사교육을 대하는 것 같아서 3년 만에 학원 일을 그만뒀다. ‘자원봉사하는 것도 아니고, 생계의 수단이 뭐 어때서.’라고 생각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1:1로 학생들과 만나 인간적인 교류를 나누면서, 서로가 서로를 단지 대상으로만 여기는 일을 견디기 어려웠다. 그러지 않으려고 겉으로 노력했지만, 내 머릿속에서 치밀하게 돌아가는 계산들은 어쩔 수 없었다. 마지막 해에는 글밥 먹는 글쟁이 특기를 살려 자소서 컨설턴트로도 일하며 많은 학생들의 대입에 도움을 주기도 하고, 단기간에 돈도 꽤 벌었지만 계속 이렇게 돈을 벌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쓰기는 분명 ‘기술’이기도 하지만, 마음을 다듬는 일이기 때문에. 


 2015년과 2016년에 만났던 수험생들 중 몇몇은 고맙게도 여전히 안부를 주고받는다. 매일매일이 피곤하고 칙칙했던 수험생들이 지금은 대학생이 되고, 입대를 하고, 연애를 하고, 해외여행을 간다. 더 이상 나는 학원 강사가 아니어서 나에겐 이제 ‘학생’이 아니라 ‘동생’들인데, 걔네들은 여전히 나를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덕분에 잊을 만할 때마다, 누군가에게 ‘선생님’이라고 불리는 일의 무게감을 느낀다. 내일은 그 동생들 중 하나가 내 시집을 구입했다고 해서 오랜만에 만나 커피를 마시기로 했다. 반가움 뒤에 바로 이어지는 노파심 하나. 오랜만에 만나 이제는 서른이 되어버린 내가 혹시 그 동생에게 ‘꼰대 짓’을 하지는 않을까. 급하게 인터넷에서 ‘꼰대 방지 5계명’을 찾아 읽는다. 


 서서히 끓어오르는 물에 담긴 개구리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익어가는 것처럼,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으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젊은 꼰대가 될 수 있음을 경계해야겠다. 꼰대는 나이가 아니라 생각의 낡음을 지적하는 말이니까. 함부로 조언하기보다 "그럴 수 있겠다."하며 들어주기에 비중을 두어야겠다. 남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나라는 사람이 나이를 헛먹지 않기 위해서. 내가 살아온 삶이 세상의 전부이고 판단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아집을 혹부리 영감의 혹처럼 달지 않기 위해서. 곱게 나이 들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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