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경빈 Feb 08. 2018

‘좋다’는 게 대체 뭐야

음, 그러니까...

 엄마, 걔는 진짜 좋은 친구야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단어의 뜻이 문득 어지럽게 흩뿌려질 때가 있다. 사랑을 다 겪어보기 전에 사랑한다는 말을 먼저 배우고, 충분히 고통스러웠던 적 없이 힘들다는 말을 먼저 배운 탓이다. 


 아직 초등학교 저학년일 때, 학교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이런저런 일들을 조잘대던 중에 엄마에게 "엄마, OO은 진짜 좋은 친구야."라고 했던 적이 많다. 뭐, 별다른 뜻이 있었겠는가. 단지 그 친구가 좋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나에게 좋은 딱지를 줬거나, 학교 앞 문방구에서 팔던 불량식품을 사다 줬거나 하는 그 정도의 호의 때문이었겠지. 아무튼 엄마에게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는데, 엄마는 대뜸 "빈아, 어떤 친구가 좋은 친구일까? 좋다는 건 뭘 얘기하는 건데?"라고 물어보시는 거다. 어린 나이에도 그건 어려운 질문이었다. 아니, 생소한 질문, 이상한 질문이었을 것이다. 좋은 게 뭐냐니 엄마, 좋은 게 그냥 좋은 거지.


좋은 사람이라는 건 뭘까


 장롱 아래 깊숙이 들어가 있던 먼지 덮인 퍼즐 조각처럼, 겨우 뜨문뜨문 이어지는 십수 년  전 기억의 조각을 이제 와 되짚어보는 이유는 엄마의 그 질문이 정말 답하기 어렵다는 걸 새삼 실감하기 때문이다. 좋다는 건 대체 뭘까. 좋은 사람이라는 건.


 이런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수십 번 읽었던 소설책을 다시 처음부터 전혀 다르게 읽어내야 하는 것 같은 어지럼증이 느껴진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단어들의 뜻이 온통 의문스러워지는 것이다. 거창하게 무슨 철학적인 사유를 하자는 게 아니라(심지어 ‘철학적’이라는 건 또 뭔 말일까. 사전적 정의로는 다 채워지지 않는 그 공백은 대체) 정말 생활의 차원에서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나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좋다는 게 뭔지도 모르고 살았다면 말이다.


 결국 살아보는 수밖에


 요컨대, 어떤 단어의 정의란 결국 뿌리의 아주 일부분만 공유될 뿐, 사람마다 다른 방향과 방식으로 뻗어나가는 가지인 것 같다. 해서, 내가 나의 방식으로 좋은 사람이어도 누구에겐 죽일 놈일 수도 있고, 내가 나의 방식으로 하는 정성 어린 사랑이 누구에겐 고통과 절망일 수 있다는 것. 그런 까닭에, 언제까지고 함부로 '안다'라고 말할 수 없는 것. 결국 살아보는 수밖에 없는 것. 


 ‘복권 당첨 운‘같은 건 전혀 없지만, 예전부터 인복이 많은 덕에 지금도 내 주변엔 좋은 사람들이 많다. 가족이나 애인, 친구, 선후배는 두말할 것도 없고 내가 거쳐 온 미래인 교육, Befm 영어 방송국, 그리고 지금도 하고 있는 칸투칸까지 다들 좋은 사람들이라 늘 감사하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아니 그래서 대체 '좋다'는 게 뭔 뜻이냐고 내게 물어도 여전히 대답하기는 어렵다. 그냥, 겪어보니 그렇다는 것이다. 살아보니, 서로 다 다르지만 또 다 좋기도 하다는 것이다. 


 나이 들수록 단언하는 말이 줄어야 한다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 자신만만하게 내뱉은 내 오만한 말들이 정말 좋은 사람들의 가슴에 비수로 꽂힐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아주 작은 소망 하나. 나도 누군가에게 좋다는 게 뭔지, 왜 좋은지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냥 겪어보니 좋은 사람으로 남을 수 있기를.



작가의 이전글 언제나 늘 항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