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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빈 Apr 20. 2016

엄마의 둥근 등

가슴이 문장이라면 등은 행간

  엄마와 나의 나이차는 딱 20살이다. 이런 얘기를 하면 보통의 반응은 "어머니 정말 젊으시다!" 이거나 "어머니께서 결혼을 일찍 하셨구나." 둘 중 하나다. 어릴 적엔 그 두 반응 중, 전자가 더 와 닿았다. 엄마와 나는 서로 대화가 잘 통하기도 했고, 아닌 것이 아니라 어렸을 적엔 주위 친구들의 어머님들에 비해 우리 엄마는 확연히 젊어 보이셨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야 말이지만  이제 엄마가 배려하고 보살펴줘야 할 연약한 여자로 보이기도 한다.


  내 나이가 이제 스물여덟. 그러니, 우리 엄마는 마흔여덟이시다. 여전히 작고 푸근한, 그리고 귀여운 우리 엄마 가 내일모레 쉰이라는 것이 실감 나지 않는다. 유난히 많아지는 흰 머리카락들만 저 혼자 세월에 새어버린 듯하다. 


  8년 간 사귄 여자친구도 있고 하니 나도 결혼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주변에 일찍 결혼한 친구, 동기들 중에는 이미 귀여운 아기가 있는 집도 있다. 그러다 보니, 문득 스무 살에 나를 낳았던 엄마를 상상해보게 되었다. 엄마와 나의 나이차에 대한 보통의 반응 중, 후자가 더 절실히 와 닿는 것이다.


  부모님의 부단한 노력으로 지금은 서민이라고 불러도 될만한 가정이 되었지만, 내가 태어날 적 우리 집은 말 그대로 가난했다. 내가 살던 삼계라는 곳은 1989년 당시 거의 제도권 밖의 동네였다. 쓰레기 차도, 버스도 오지 않는 곳. 산 아래 겨우 3, 4가구만이 고요히 자리 잡은 곳. 내 장난감이자 친구는 올챙이나 개구리, 방아깨비, 여치, 강아지였다. 화장실도 없이 몇 년을 살다가, 아버지가 땅을 파 만든 재래식 똥통 화장실이 감격스러워 손님이 올 때마다 나는 화장실을 자랑하곤 했다. 


  그런 곳에서, 아직 소녀 티를 벗지 못한 스무 살의 키 작은 그녀가 나를 낳아 길렀다. 10월의 마지막 날에 태어난 나를, 그래도 저 스스로 목을 가누고 배밀이를 할 수 있을 때까지, 그 겨울 동안 그녀는 나를 대신해 가난을 덮고 잠들었으리라. 1, 2시간마다 잠에서 깨 우는 나를 달래 주고, 식은 아랫목을 더듬으며 연탄을 새로 갈았으리라. 겨우 스무 살의 키 작은 그녀가. 나의 철없던 스무 살을 돌이켜보면, 그녀가 그런 환경에서 한 생명을 길러냈다는 것은 기적 같다. 그리고 그 기적의 배면에는 청춘의 푸르름이 푸른 멍으로 남겨졌을 그녀의, 우리 엄마의 희생이 있었음을 이제는 안다. 


  가끔 본가에 가면, 요리 솜씨도 좋고 손도 큰 우리 엄마는 늘 부엌에서 나를 위한 음식을 준비해주신다. 그 둥근 등을 보노라면, 차마 다 말하지 못했지만 문장보다 더 깊은 여운의 행간을 읽는 기분이 든다. 행간을 읽고 있노라면, 나의 감사함은 문득 죄송스러움이 된다. 가난의 한 가운데에서 덜컥 태어난 나의 출생은 축복이기만 했을까. 


  가을은 하늘이 높아 그늘도 깊은 것 같다. 엄마의 그 희생이 너무 감사해서 내 마음의 죄송스러움도 깊다. 

가끔 나는 나의 출생이 씁쓸하다.





가을
 

 하늘이 높아지면 그늘도 깊어지는지
 
 설거지하는 엄마의 둥근 등
 피우려다 말고 제 안에서 입구를 닫아 건
 연꽃 봉오리 같다
 스물의 여름날, 피워야 할 꽃 대신 
 둥글게 부푸는 뱃속의 그늘을 키웠을 것이다
 내가 태어난 89년 10월의 마지막 날
 가을 하늘은 얼마나 높았을까
 그늘은 얼마나 깊었을까
 
 그늘이 깊어지면 몸 끝이 타들어가는지
 집에서 나와 돌아가는 거리마다 단풍은 붉고 
 엄마의 팔다리는 자주 저리다
 
 나는 가끔 나의 출생이 씁쓸하다
 
 다시,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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