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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강 Mar 05. 2016

엄마 딸이어서 고마워! -22

## 낙타초를 태우고 별을 노래하고

 푸쉬카르의 사막 사파리는  사막을 걷는 것 보다 잘 닦인 아스팔트 길과 농가를 낀 소로를 걷는 시간이 더 길다. 자동차들이 쌩쌩 달리는 길을 껌벅껌벅 졸린 눈을 한 낙타를 타고 더딘 걸음을 걷는다. 마치 광속의 디지털 세상을  거슬러 혼자 아날로그적 삶을 사는 것 같다. 인도의 푸쉬카르가 놀라운 것은 아날로그적 삶을 사는 이들을 재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대로  밀어버릴 듯 달려오던 자동차는 낙타가 지나갈 때까지 길을 내주고 기다린다. 경적을 짜증스럽게 울려대거나 욕을 하는 이도 없다. 낙타  몰이꾼도 낙타를 보채지 않는다. 열일곱의 소년과 마흔셋의 중년 남자는 농가로 가는 내내 수레에 태평스럽게  누워 즐거운 소통을 하고 있었다.

 낙타는 느릿느릿 걸음을 옮기다가  낙타초를 닮은 가시나무잎을 훑어 먹었다. 푸른 잎이 달려있긴 하지만 새끼 손가락 길이 정도의  바늘 같은 억센 가시를 씹느라 늘어진 아래턱을 우물거린다. 가끔은 사람을 태웠다는 것을 잊고 가시나무로 달려드는 낙타 때문에 따끔거리는 가시를 피하느라 곤욕을 치르기도 한다. 가시나무  잎을 먹는 낙타!


사막에 핀 가시

낙타초를 씹는다

낙타처럼 사막을 목 구녕 속으로 밀어 넣고

솟구치는 침묵을 심장에다가 구겨 넣는다.   

     
                                                                             -문정희의 '낙타초' 중에서

 사막을 걷는 낙타는 목마름을 견디다 마지막에 낙타초를 먹는다고 한다. 살아남기 위해 가시를 찔려 흘린 피로 수분을 보충하여 생명을 연장한다.  나는 지독한 간절함을 위해 삼킨 낙타 초가 있었던가? 스스로 낸 상처를 견뎌내며 살기 위해 몸부림친 적이 있었던가?

어느덧 등 뒤로 빛나던 태양이 서쪽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떠오르는 태양만큼 지는 태양도 아름답다. 하루를 열심히 견뎌내고 물러설 때를 알고  떨어지는 붉은  태양은 홀가분해 보인다.

사막의 일몰

 소로를 따라 양옆으로 농가들이 있다.  이 척박한 땅에 생명이 자랄까 싶다. 풀풀 날리는 고운 흙은 생명을 붙잡고 있을 힘도 없는 듯하다. 그러나 울타리 안에는 울창한 과수들이 꼿꼿하게 자라고 있었다. 나무 밑에는  시금치처럼 생긴 싱그런 채소들이 소담스럽게 자라고 있었다.

 참  우직한 사람들이다. 최첨단 농기구도 귀한 시골에서 손으로 일일이 돌을 주워 나르고 땅을 일구는 모습은 조금은 아둔해 보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자연과 하나가 되어 묵묵히 자신의 삶을 살고 있었다.


"지나친 친절은 상대를 곤란하게 한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

하룻밤 묵기로 한 농가 입구에 들어서자 호탕한 시어머니가 양팔을 벌리며 마중을 나왔다.

"나마스떼"

"나마스떼"


 지나온 길을 다시 걷는다는 것은 산을 내려오는 것과 같다. 정상을 향해 숨을 헐떡이며 오르던 산을 내려오며 바람에 흔들리는 야생화를 만나고 노래하는  새들을 만나는 것과 같다. 모든 것은 그대로 있는듯했다. 100세 시 할머니, 과묵한 시아버지, 별채에 머무는  홀로 된 시누이네, 스물다섯 살 된 며느리와 두 아들! 어제 만난 사람들처럼 반가웠다. 며느리의 몸이 불은 듯했다. 자세히 보니 배가 불룩해져 있었다.

"아기를 가졌어요?"

"8개월이에요"

"그럼  여름에도 임신 중이었어요?"

"그때 4개월이었지요"

몰랐다. 시멘트 바닥에 앉아 커다란 함지 가득 담긴 짜파티를 굽던 고운 새댁이었다. 내가 다가가 짜파티 반죽을 밀어주자 작은 목소리로  "힘들어요"라는 말을 하며 이방인에 대한 동경을 두 눈에 가득 담고 있던 그녀였다. 부른 배를 안고 땔감을 이고 나르는 그녀의 고된 삶이 안쓰러웠다. 깊은 회색 눈이 아름다웠던 두 아들도 부쩍 자라 있었다.  넓은 밭과 낙타, 말, 버펄로, 염소까지 기르는 인도의 농가에서 층층시하의 어른 들과 세 아이를 길러야 하는 그녀의 삶의 무게가 느껴졌다.

 "아이 귀여워!"

 참새들은 아이들을 보고 달려갔다. 깊고 커다란 눈에 흠뻑 빠져 아이들 곁을 떠나지 않았다.


우리들은 방갈로에 짐을 풀었다. 여름에 느꼈던 공포가 생각났다. 눅눅하고 음산한 방갈로에서 마주했던 적막한 어둠의 공포는 나를 잠들지 못하게 했다.  한숨도 못 자고 맞은 태양을 보며 얼마나 울었던지!  주인장은 혹시라도 비가 오거나 밖이 불편하면 들어가 자라고 말했지만 나는 다시 어둠과 싸우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하늘을 이고 자는 것이 편할 듯했다.

"엄마, 화장실은 어디야?"

참새들은 어디 가나 화장실부터 확인했다. 깨끗한 화장실과 수도시설은 방갈로 옆쪽에 있었다.  따로 떨어져 있어 주인장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었다.

아쇽과 농가의 일꾼은 방갈로 옆에 우리들의 잠자리를 마련하고 있었다. 간이용 침대를 펴고 그 위에 매트리스를 깔고 덮고 잘 깨끗한 이불과 베개를 사람 수에 맞게 깔아놓았다.

"밤에 무척 추워요"

잠자리를 봐주던 아쇽이 말했다.

"괜찮아 참을 수 있어"

어둠보다는 추위와 싸우는 편이 나을 듯했다.


아쇽은 쇠스랑 끝에 낙타가 먹던 마른 가시나무를 달고 왔다. 밤새 추위를 덜어줄 불을 지펴야 했는데 사막이라 나무가 별로 없다고 미안해했다. 처음엔 괜찮다고 했는데 불을 지펴보고는 이내 후회했다. 가시나무는 속 빈 갈대처럼 정말 힘없게 타 버렸다. 아쇽이 가져다 놓은 나무로는 낼 아침까지는 커녕 밤도 못 샐 것 같았다.

 해가 지니 냉기가 몰려왔다. 경량 패딩을 입었는데도 써늘했다. 불을 지피고 따뜻한 불 옆으로 모여들었다. 주인장이 둘러보러 나왔다가 이불에 불씨가 티면 안된다고 침대를 멀찍이 떨어뜨려 달라고 했다. 알았다고 웃으며 대답만 하고는 그대로 있었다. 주인장에게 나의 딸들을 소개해 주었다. 주인장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장난하지 말라고 했다. 내가 사실이라고 했더니 내 나이를 물어왔다.

"당신은 몇 살입니까?"

"마흔여섯 살"

"진짜?"

"물론 난 이 아이들의 엄마가 맞아"

"믿을 수 없어. 당신은 아직 젊어 보이는 데 이렇게 큰 딸들이 있다니......"

 나이 한 살 더 먹고 늘어난 주름살에 한숨이 났었는데 젊어 보인다니 기분이 좋았다.


 짤막한 키에 똥땅 한 주인장은 자리를 제대로 잡더니 장윤정의 '어머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나와 참새들은 놀라서 박수를 쳤다.

"이 노래 알아요?"

주인장이 내게 물었다. 나는 그가 놓친 부분을 채워가며 노래를 같이 노래를 불러주었다.

"알지요. 근데 어디서 배웠어요?"

"우리 집에 온 한국사람들한테 배웠어요. 나 한국말 , 한국 노래 조금 알아요"

주인장은 "쿵따리 사바라", "아리랑"을 연달아 불렀다. 한국말도 잘하는데 한국 노래도 잘했다. 주인장이 잘 쓰는 한국말이 몇 가지 있었다.

"진짜?"

"행복해요? 좋아요? 진짜 좋아요?"

 참새들은 "헐~" "대박" 감탄사를 넣었다. 주인장은 곧바로 따라 했다.

"참새들, 저 사람한테는 네가 하는 말이 한국말의 전부일 수 있어 이왕이면 정확하고 좋은 말들을 가르쳐줘!"

언어가 소통을 위한 것이지만 소통을 통해 한나라의 문화와 민족성을 알게 해주는 중요한 표현 수단인 만큼 외국에 나와서는 이왕이면 정확하고 조심스럽게 알려주어야 할 것 같다는 책임감이 들었다.


"엄마, 밥 언제 먹어?"

"조금 더 있어야 할 걸"

"배고파"

"나도 배고파"

인도 사람들은 늦은 저녁 식사 후 바로 잠자리에 든다.  라지의 아침을 먹고 난 이후로 제대로 먹지 않아 허기가 졌다. 아쉬운 대로 비스킷과 오렌지로 허기를 달랬다. 아홉 시가 되어서야 저녁식사를 하러 오라는 전갈이 왔다.

 이 집 시어머니의 음식 솜씨는 최고다. 내가 먹어본 인도 음식 중에서 가장 내 입에 잘 맞고 정성스럽다. 여름엔 자신이 요리하는 것을 배우라고 "쿠킹 클래스"를 열기도 했다. 당당 하고 넉살 좋은 시어머니는 자신을 드러내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다. 거실에는 쌀밥과 짜파티, 달, 카레 그리고 다히와 샐러드까지 푸짐하게 한 상  차려져 있었다.

"와 맛있겠다"

인도 음식을 제대로 먹어보지 못한 참새들의 입에도 합격이었다. 인도의 가정식 백반을 먹어본 참새들은 "맛있어 맛있어" 노래를 부르며 접시를 싹싹 비웠다. 다시 먹어도 역시 최고의 요리였다.  가족들은 우리가 "그만"이라고 강하게 거절할 때까지  빈 접시를  채워주었다. 우리는 두 손을 모아 맛있는 저녁식사에 대한 감사의 인사를 했다.


 나무를 아껴 때야 할 것 같았다. 불이 작아지면 금세 한기가 파고들었다. 방법을 찾아야 했다.

"노 프라블럼"

안되면 되게 하면 되었다. 주인장에겐 미안했지만 가시철조망 사이에 끼워 놓은 굵은 가시나무를 연료 로쓸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둘러봐도 메마른 사막에서 땔감으로 사용할 만한 나무를 찾을 수 없었다. 작은 참새와  가시에 찔려가며 울타리의 가시나무를 걷어다 한아름 쌓아 놓고 침대에 앉았다.


우리들은 나란히 앉아 음악을 틀어놓고 타오르는 불꽃을 바라보았다.

"그대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 내가 가는 길이 험하고 멀지라도 그대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

노래가 흐르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노래를 따라 불렀다. 리듬에 맞춰 몸을 흔들다가 무릎을 두드리고 발을 굴렀다. 밤하늘에 별들이 반짝거렸다.

"엄마, 배고프지 않아"

저녁을 푸짐하게 먹었는데도 뭔가 허전했다.

"우리 라면 먹을까?"

"어떻게?"

"노 프라블럼"

 자이살메르를 갈 생각으로 사막 한 가운데서 끓여먹을 라면을 5 봉지를 준비해 왔다.  그런데 푸쉬카르로 장소가 바뀌고 사막에서 비박을 하려던 계획도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 수정했다. 결국 농가를 낀 사막체험을 하기로 한 것인데 라면이 그대로 있어서 지금 먹지 않으면 먹을 시간이 없을 듯했다. 큰 참새와 나는 라면 2 봉지를 들고  안채로 들어가 부엌을 쓸 수 있는지 물었다.

"노~ 프라블럼! 우리는 한 가족이에요."

시어머니는 편하게 사용하라며 흔쾌히 부엌을 내주었다. 큰 참새와 내가 라면을 끓이는 동안 시어머니와 시누이의 딸 그리고 아쇽이 신기한 듯 쳐다보며 우리 곁을 지키고 있었다.  방갈로로 돌아온 우리는 저녁을 굶은 사람들처럼 허겁지겁 라면 냄비에 달려들었다.  얼큰하고짭쪼름한 신라면의 맛이 기가 막혔다. 라면이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었나! 한국에서는 잘 먹지도 않았는데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라면을 먹은 것 같았다. 참새들이 남은 바닥에 남은 국물까지 들이키고 냄비를 내려놓았다. 배를 채우고 나니  왠지 우리끼리 맛있는 것을 몰래 숨어 먹은 것 같았다. 저녁이 맘에 들지 않았다는  인상을 줄 것 도 같았다. 미안한 생각이 들어 라면 2 봉지를 들고 부엌으로 갔다. 시어머니에게 라면을 내밀었다.

"당신도 한 번 먹어볼래요?"

"고마워요!"

야속과 아이들도 좋다고 했다. 큰 참새가 라면을 끓여 그들 앞에 놓았다. 우리는 불기 전에 먹으라고 일러 놓고 부엌을 나왔다.

 돌아서 나오는데 지난번 여행에서 지인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인도 사람들과 함부로 음식을 나눠 먹으면 안 돼. 여긴 계급이 다른 사람들과는 음식을 나눠 먹지 않아. 종교적인 문제 때문에 채식을 하는 사람도 많기 때문에 생각 없이 친절을 베풀다 예상치도 못한 어려움에 부닥칠 수도 있어."

 나는 이들의 종교가 무엇인지 모른다. 채식주의자인지 아닌지도 모른다. 만약 이들이 힌두교도나  채식주의자라면 우리는 큰 실수를 한 것이었다. 겁이 덜컥 났다. 내 얘기를 들은 큰 참새는 나의 경솔함을 책망했다. 마음을 조리고 있는데 어둠 속에서 주인장이 나타났다.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잘못하면 쫓겨날 수도 있었다.

"당신이 준 한국 라면 이름이 뭐예요?"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다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닭고기 수프가 들어간 꼬꼬면이에요?"

"닭고기?"

 최소한 소고기의 위험에서는 벗어나고 싶었다.

"'당신은 채식주의자인가요?"

주인장은 원래는 아니었는데 3년 전부터 채식주의자가 되었고 술과 담배도 끊었다고 했다.

"한국 라면 맛있어요!"

 주인장이 엄지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하지만 나는 인도의 문화를  제대로 숙지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한 나 자신이 정말 부끄러웠다. 적어도  마주 앉은 상대에 대한 이해는 필요했다. 참새들 마음을 졸이게 한 생각 없고 철없는 엄마가 되어 버렸다. 솔직히 그들이 정말 라면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도 정말 어리석은 친절이었다. 지나친 친절은 상대를 곤란하게 한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아쇽이 동생과 함께 인도의 전통악기 타블라를 들고 잠시 머물렀다. 우리들이 노래를 부르자 리듬에 맞춰 타블라를 두드렸다. 한국의 장구 모양에 북소리를 넣은 듯한 타블라 소리가 멋지게 울렸다. 참새들도 돌아가며 타블라를 연주했다. 큰 참새의 타블라 소리가 감각적으로 들렸다. 큰 참새의 피아노 소리는 두 눈을 감게 하는데 타블라 연주 솜씨도 제법이었다. 아쇽이 굿 나이트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사막에서의 밤 어때?"

"난 너무 좋아 최고야 최고!"

작은 참새는 환상적인 밤이라는 표현을 썼다.

"밤하늘의 별이 이쁘네. 걱정도 접고 생각도 접고 이렇게 앉아 있으니까 좋아요.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어!"

큰 참새가 고개를 젖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떤 걱정이 있었어?"

"뭐 그냥...... 방학식도 안 하고 와서 숙제 걱정도 되고 이제 고3이니까 미래에 대한 걱정도 되고, 엄마 걱정, 아빠 걱정 , 할머니 걱정 , 말썽꾸러기 내 동생 걱정도 되고."

"내가 왜? 난 게임만 하는 언니가 걱정이구만."

"그렇구나! 생각할수록 걱정이 정말 많네."

"엄만 어때?"

 큰 참새의 "엄만 어때"란 짧은 물음엔 여러 가지 질문이 포함되어 있으리라. 난 어떨까?

"엄만, 글쎄. 지금 이 순간 사랑하는 참새들이랑 있으니 좋아. 네 말대로 아무 생각 안 하고 이 순간을 즐기고 싶어. 하지만 돌아가야겠지! 깜깜한 내일을 어떻게 살지 생각도 해야겠지. 그런데 그냥 한 번 가보려고 해. 어디선가 빛나는 불빛을 찾아 당당하게 가보려고. 참새들에게 당 당하고 멋진 엄마가 되려고 해!"

"엄만, 지금도 멋져요! 내가 아는 어른 중에서 가장 어른다운 어른 인걸!"

"가장 어른다운 어른!" 큰 참새의 말에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늘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하양 앞치마를 두르고 장독대를 닦는 여인을 꿈꿨지만 결혼은 나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었다. 지칠 대로 지친 몸을 다독여 눈을 떴을 땐 자유롭고 싶었다. 나도 모르게 내 속에서 자라고 있었던 날카로운 송곳이 언제 또 튀어나올지 알 수 없었다.

"맞아! 엄만 언제나 우리를 가장 잘 이해해주는 친구 같은 엄마야!"

작은 참새가 언니를 거들어 나를 위로했다.

"우리 참새들 말도 참 이쁘게 하네"

"엄마가 가르쳐 줬잖아요. 말하는 법, 대화하는 법, 인사하는 법!"

"고마워 딸들!"

푸른 밤하늘에 참새들처럼 청아한 별들이 쏟아질 듯 반짝이고 있었다.

"사랑해!"

"사랑해!"

"에브리바디 사랑해!"

작은 참새가 고개를 젖히고 목청껏 소리를 질렀다.

어린 왕자가 사는 소행성 B612호가 수많은 별들 속에서 깜빡거리며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른 낙타초를 태우며 우리는 밤새 별을 노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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