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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강 Mar 07. 2016

엄마 딸이어서 고마워! - 26

## 안개 속의 타지마할

택시는 구불구불한 아스팔트를 시원하게  달렸다. 아즈메르 거리의 요란한 경적소리와 현란한 광고판이 나타나자 마치 조용한 동굴 속에서 햇빛으로 나온 듯 눈과 귀가 따가웠다. 할 수만 있다면 다시 뒷걸음질 쳐 동굴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택시왈라에게 300루피를 주고 아즈메르역에 내렸다. 우리는 3시에  아즈메르역에서 아그라포트역까지 가는 기차를 타야했다. 9시 40분 아그라 포트역에 도착 예정이었지만 일반기차의 CC칸을 예매해서 식사를 비롯한 기타의 서비스를 받을 수 없었다. 밥 먹을 시간이 없을 것 같아  기차역 내에 있는 노점에서 30루피의 토스트와 20루피의 물을 두 개씩 샀다.   참새들은 자리를 확인하고 기차가 출발하자마자 잠이 들었다. 중간에 잠시 일어나  토스트를 먹고는 또 다시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시도 때도 없이 노 프라블럼!"


 기차는 달리고 내 머리속은 복잡하게 엉켜 있었다. 아그라포트역에 제 시간에 도착한다고 해도 한밤중이었다. 릭샤를 타고 타지마할 남문까지 가서 숙소를 잡아야 했다. 숙소를 바로 찾으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어떻게 할 것인지 생각해야 했다.


 인생은 참 복잡하다. 일어나지 않은 일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지만 일어날 것 같은 일들을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린다.  설상가상으로 기차안을 휘젓고 다니는 몰상식한 인도 승객덕분에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9시40분 도착 예정이었던 기차는 1시간 10분을 더 달렸다. 기분도 언짢고 마음도 불편한데 신발끈을 조여야 했다. 기차역을 나서자 어김없이 릭샤왈라들이 달려  들었다. 적당히 흥정을 하고  릭샤에 올라탔다. 아그라의 밤공기는 서늘했다.

 달리는 릭샤왈라에게 사정 얘길 했더니 자기가 숙소와 식당을 안내해 주겠다고 했다.  타지마할을 볼 수 있는 숙소로 우리를 안내했는데 첫번째 게스트 하우스는 1000루피를 달라고 했다. 게스트하우스는 깨끗했지만 너무 비쌌다. 두곳을 더 들렀지만 방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600루피를 불렀는데 방을 보고 결정하기로 했다. 주인장이 권한 방은  먼지가 뽀얗게 앉은  가구와 변기 뚜껑도 없는 변기가 있는 형편없는  방이었다. 저기에 앉아 볼일을  보다가는 엉덩이가 밑으로 쑥 빠져 버릴것 같았다. 주인장에게 따지니  

"노 프라블럼"  이란다.

"시도 때도 없이 노 프라블럼!"

나도 모르게 욕이 나왔다. 제대로 된 다른 방을 보여 달라고 했더니 그나마 멀쩡해 보이는 방을 열어주었다. 언제까지 하룻밤  묵을 방을 고르느라 지친 참새들을 밖에 세워둘 수는 없었다. 500루피에  하룻밤을 묵기로 했다. 아그라의 방들은 정말 형편없다. 벌레가 기어 나올것 같은 숙소들 투성이다. 여름에도 축축한 귀신소굴 같은 방에서 자고 일어나니 온 몸이 근질거리고 무엇에 물린듯 빨간 반점들이 일어났다. 호텔이라는 간판이 무색할 만큼  속은 엉망이었다.


 배낭을 올려다 놓고 릭샤왈라가 소개해 준 식당으로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잠자리에 들려던 식당 주인이 일어나 주문을 받았다. 릭샤 왈라에게는 40루피를 더 얹어 100루피를 주었다. 야간에 여자 셋을 태우고 숙소에 식당까지 알아봐준것에 대한 대가였다.


 메뉴판에 가득한 한국음식을 모두 먹어보고 싶을 만큼 배가 고팠다. 한정식과 오믈렛, 누들 수프를 주문하고 버석거리는 먼지를 털어냈다. 허름한 식당이었는데 의외로 음식은  우리 입맛에 맞았다. 이시간에 하얀 쌀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참새들은 갓 지어 나온 찰진 쌀밥에 감탄했다. 시간은 자정을 넘어서고 있었다.


숙소에서 바라본 타지마할

 아침에 일어나 옥상에 올라가보니 뿌연 먼지에 휩싸인  타지마할이 보였다. 안개인것 같기도 하고 미세먼지 같기도 한 것이 하늘을 덮고 있어 불투명한 유리 안에 갇힌 듯 했다. 마을에 곧 모래폭풍이라도 불어닥칠 것 같았다.

 아그라에서는 머무를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다. 오직 타지마할을 보기 위해 달려왔을 뿐이었다.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밤 10시 40분 기차를 타고 바라나시로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참새들! 오늘은 힘들어도 조금 서둘러 움직이자."

큰 참새는 아그라의 탁한 공기에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기침과 가래가 끓기  시작했고 아래입술을 깨물고는 있지만 힘들어 보였다..

나는 모른 척 하기로 했다. 큰 참새가 힘들다고 말할 때까지 그리고 방법을 제시할 때까지 모른 척 앞으로 나가기로 했다. 그러나 참새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공사 중인 타지마할

  산티로지 숙소에서 오분 거리에 타지마할로 들어가는 남문이 있다. 안쪽 깊숙히 들어가 있는 외국인 전용창구에서 입장권을 끊었다. 750루피!한화로 15,000원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가격이다. 인도 사람들과 비교하면 75배 차이가 난다. 인도관람객은 10루피 ! 200원이면 들어갈 수 있다. 돈의 가치가 다르다고는 해도 너무하다 싶었다.  울며 겨자먹기로 입장권을 끊고 돌아서려는데 매표소 직원이 우리를 불렀다.

"15세 이하는 무료 입장인데 네가 해당되는것 같다."

작은 참새를 가리키며 여권을 다시 달라고 했다. 작은 참새의 생일이 아직 43일이나 남아 있었다.

"와우! 이게 웬 횡재야"

"그러게! 거한 밥값을 벌었는데"


외국인에게만 지급되는 생수와 신발커버를 받아가지고 나오는데 청바지 차림의 백인 남자가 다가왔다. 낯이 익다 싶었는데 여름에도 호객행위를 하던 사람이었다. 타지마할 입구에는  먼저 들여보내 준다거나 안내를 해 주겠다며 돈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문화 해설사 정도로 생각하면 편하지만 그 대가가 천차만별이라 믿음이 가지 않았다. 우리는 호객꾼을 외면한 채 뜻밖의 행운을 즐기며 안으로 들어갔다.,


공사전의 타지마할

타지마할은 세계인들에게 넘치는 사랑을 받고 있었다. 각국에서 온 관광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사람들은 타지마할을 사진에 담으려고 앞다투어 포토존 앞에 섰다. 우리는 유료 사진사가 사진을 찍는 장소와 관광객의 포즈를 유심히 보고 있었다. 멋진 사진을 찍기 위한  "전문가 따라하기" 였다. 그러나 정작 멋진 배경이 돼 주어야할 타지마할은 온통 보수공사 중이었다. 두 개의 기둥은 철근 구조물에 둘러싸여 있고 긴 줄을 따라 뒷편으로 돌아가자 상태는 더 심각했다. 이렇게 대대적인 공사를 하면서 입장료를 다 받다니! 뻔뻔하고 한심스러웠다.

타지마할은 무굴제국의 5대 황제였던 샤 자한이 사랑하던 왕비 무무타즈 마할을 위해 지은 무덤이다. "마할"은 보통 "궁전"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타지마할의 "마할"은 궁전의 의미가 아니라 왕비의 칭호가 변한 말이다. 건축광이었던 샤 자한은 1631년 왕비가 죽자 국력을 쏟아부어  타지마할을 건설했다. 세계 각지에서 모은 대리석과 보석, 장인들을 모집해 22년만에 완성했다. 원래는 타지마할이 있는 야무나 강 건너편에 하얀 대리석의 타지마할과 마주할 검은 대리석의 타지마할을 지으려고 했다. 하지만 아들 아우랑제브에게 폐위 되면서 검은 타지마할의 꿈은 이루지 못한 채 지금은  왕비의 곁에 누워 있다.


 정면에 넓게 펼쳐진 연못과 정원을 앞에 두고 완벽한 좌우대칭을 이루는 거대한 모스크는 무덤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1983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대표적인 이슬람건축물답게 하늘로 우뚝 솟은 하얀 무덤은 생전의  샤 자한과 무무타즈의 사랑이 피어나는 궁전일것이라는 착각을 일으켰다.

타지마할 양쪽에 위치한  모스크

파란 하늘 아래 빛나는 하얀 진주를 만나고 싶었지만 하늘은 잔뜩 흐려 있었다. 비바람을 견디던 시간만큼 색이 바랜 타지마할이 뿌연 먼지에 싸여 사람들을 맞이했다.


샤 자한과 왕비의  관을 보기 위해 안으로  들어갔지만 좁은 공간에서 밀고 당기는 몸싸움에 밀려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참새들은 위압적인 경비원들의 목소리에 놀라  뒷걸음질 쳤다.

"엄마는 너를  사랑해!  엄마 딸이어서 고마워!"

 설렁설렁 타지마할을 돌아 나온 것 같았다. 보수공사와 흐린 하늘 아래 서 있는 타지마할은 신비롭지도 장엄해보이지도 않았다. 결국 한 사람의 무덤이 아니던가! 아내에 대한 그리움을 하얀 대리석 궁전에 묻어두고 싶었던 샤 자한의 마음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죽은 자는 자신의 죽음을 바라보는 산 자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까?

상례와 제례가 죽은자가 아닌 산 자를 위한 것이라 했던 도울선생의 말이 생각났다.. 죽은 자에 대한 산 자의 예를 보고 '나도 죽으면 저런 예를 받겠지 '라는 생각을 한다고 한다. 그래서 상례와 제례에 정성을 다하는 지도 모르겠다.


나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분명  행복한 일이다.  하지만 그 보다는 곁에 있을 때 사랑해 주는 것이 더 나을것 같다. 온 마음을 다해 사랑했다면 편안하게 잠들도록 놓을 줄도 알아야 할 것 같다. 왕비는  백성들의 피로  지은 타지마할 안에서 편히 잠들지 못 할 것 같았다.


"죽은 다음에 울어준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


 스물 한살  어느날 갑자기  엄마를 잃고 나서 가장 후회했던 것이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은 것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했던 엄마에게  한번도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엄마가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말했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놓지 못해  울지는 않았을 것 같다. 


 "사랑해!"

 나는 끊임없이 말한다. 사랑받는  것이 사랑하는 것 보다 행복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것보다 사랑 받는 다고 느끼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타지마할을 나오면서 참새들에게 말했다.


"엄마는 너를  사랑해!  엄마 딸이어서 고마워!"


안개에  싸인 타지마할이 멀어져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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