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다시 바라나시에 왔다.
"바라나시의 첫인상은
약에 취해 흐느적거리는 미친 도시였다. "
"지금까지의 인도는 잊어라."
여름, 바라나시에 처음 온 날 내가 한 말이었다. 지금까지의 인도는 인도가 아니었다. 바라나시는 진짜 인도를 만날 수 있는 곳이었다. 우리에게는 갠지스 강(Ganges)으로 더 친숙한 강가(Ganga- 갠지스 강 여신의 이름) 을 따라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곳이며 특별히 무엇을 하지 않아도 시간이 의미 있게 흐르는 곳이다. 쫓기듯 달려갈 필요도 없고 무엇을 알고자 따라갈 필요도 없다. 흐르는 시간 속에 머물다 보면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많은 여행자들이 오래 머물고 싶어 하는 곳이었다.
"미친 바라나시!"
바라나시의 첫인상은 약에 취해 흐느적거리는 미친 도시였다. 우기라 강가의 범람으로 가트의 대부분은 물에 잠기고 거리마저 질퍽거려 물고인 거리의 늪을 걷는 것 같았다. 성지순례기 간이라 맨발에 주황색 옷을 입고 괴성을 지르며 강가로 뛰어드는 사람들은 반쯤 미친 듯했다. 1미터도 안 되는 좁은 골목을 경적을 울리며 다니는 오토바이와 질펀한 똥을 싸 지르며 유유히 걷는 집채만 한 소, 병든 개들 그리고 도로 한쪽에 길게 늘어앉아 "마담 마담" 하며 손을 내미는 걸인들은 나를 미치게 했었다.
"씨발 씨발 씨발!"
달려오는 오토바이를 피해 한쪽으로 몸을 피하면서 욕을 했었다. 무엇보다 강가의 가트(Gaht)로 연결된 미로 같은 좁은 골목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멍해져서는 숙소에 돌아와 울고 말았었다. 그런 바라나시에 나는 다시 와 있었다.
"엄마가 멈출 때까지 놓치지 말고 따라와. 한 눈 팔면 안 돼"
바라나시 역에서 고돌리아(Goodowlia)까지 오토릭샤를 타고 이동했다. 100루피를 주었지만 오토릭샤가 들어갈 수 있는 곳은 고돌리아 교차로 바로 전까지다. 거기서 부터는 릭샤에서 내려 배낭을 짊어지고 메인가 트인 "다사슈와메드 가트"까지 걸어서 이동해야 했다. 강 근처에 싼 여관이 많고 강가를 가까이서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참새들은 바라나시의 혼잡함에 잔뜩 긴장했다. 내가 처음 바라나시에 도착했을 때 그 느낌일 것 같았다. 거리를 잔뜩 메운 사람들과 차선도 없고 중앙선도 없이 경적을 울리며 오직 앞을 향해서만 달려가는 자동차와 오토바이, 그리고 릭샤와 그 사이를 여유롭게 걸어 다니는 덩치 큰 소까지!
셋이 나란히 가기엔 혼잡한 곳이라 일렬로 서서 빠르게 걸었다.
"엄마가 멈출 때까지 놓치지 말고 따라와. 한 눈 팔면 안 돼"
일곱 살짜리 어린아이에게 이르듯 힘을 주어 다짐을 받아냈다. 큰 참새는 이미 넋이 나간 얼굴을 하고서도 작은 참새를 놓칠까 봐 손을 꼭 잡고 있었다.
10여분 동안 혼잡한 고돌리아를 빠져나온 참새들은 지쳐 있었다. 소리에 정신을 반쯤 빼앗기고 사람들과 부딪치지 않으려 신경을 곤두세우고 걸었을 것이다. 나도 약간의 두통과 피로로 지쳐 있었다.
나는 여름에 묶었던 "시바 게스트하우스"를 찾아가기로 했다. 그런데 방이 있을지 의문이었다. 지금은 인도의 겨울. 인도 여행의 성수기가 아닌가! 지친 참새들을 끌고 다닐 수는 없었다. 할 수 없이 참새들은 시바 게스트 하우스 근처에 있는 "바 나라씨 가게"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여기가 엄마 사진 속에 있던 그 라씨 가게예요?"
"응. 바라나시의 라씨를 맛보고 있어. 정말 맛있어! 엄마는 방을 알아보고 올게. "
30루피를 주고 빨간 석류가 뿌려진 플레인 라씨를 주문했다. 라씨가 나오고 참새들이 라씨를 먹는 것을 보고 가게를 나섰다.
여름에 묵었던 게스트 하우스에는 남은 방이 없었다. 주인장은 나를 기억하고 먼저 알은체를 했다. 그리고는 방이 없어 미안하다며 "우르바시 게스트 하우스"를 소개해 주었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우르바시 게스트 하우스로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한 시라도 빨리 눕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다행히 유명한 독일빵집 "모나리자" 맞은편에 있는 우르바시 게스트 하우스에는 우리가 묵을 방이 있었다. 400루피에 6일 동안 머무르기로 했다.
라씨 가게에서 나를 기다리던 참새들을 데리고 다시 우르바시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왔다. 문을 열고 침대를 보는 순간 그대로 눕고 말았다. 이대로 한 숨 푹 자고 일어났으면 싶었다. 하지만 무엇이든 먹어야 했다. 참새들이 하루 종일 비스킷 몇 조각으로 버티고 있었다. 기차에서는 왜 음식이 넘어가지 않는지 모르겠다. 덜컹거리는 기차에 속도 울렁거리는 것 같다.
"엄마, 수건이 없어요. 일층에 가서 얘기하고 올게요."
그 와중에도 꼼꼼한 작은 참새는 숙소에 비치된 물건들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일층에 가서 수건을 넉넉히 얻어 왔다. 야무진 에너자이저 같은 녀석이다. 반면에 큰 참새는 이불속으로 파고 들어가 있었다. 몸이 좋지 않은 듯했다. 그러나 괜찮냐고 묻는 나에게 언제나처럼 괜찮다고 했다. 나는 참새의 말을 그 어느 때보다 믿고 싶었다. 아프지 마라. 아프지 마라.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밥 먹고 씻을까? 아니면 씻고 나서 먹을까?"
참새들의 의견이 서로 달랐다. 큰 참새는 먹고 씻길 원했고, 작은 참새는 씻고 먹길 원했다. 이럴 땐 내가 나서야 했다. 어느 한 쪽 편을 일방적으로 든다는 느낌이 들지 않도록 합리적인 결정을 내려야 했다. 우선 참새들이 왜 그런 의견을 냈는지 물어보았다.
"엄마, 저녁 먹고 우리 할 거 있어요?"
큰 참새가 물었다.
"가트 잠깐 나갔다 올까 하는데 꼭 가지 않아도 돼. 그리곤 오늘은 피곤하니까 그냥 쉴까 해"
"그럼 난 먹고 씻을래요. 어차피 여태 씻지도 않고 돌아다녔는데 밥 먹고 자기 전에 씻는 게 나을 것 같아요. 배도 엄청 고파요"
"나도 배고프지만 좀 찝찝해. 씻고 개운하게 밥 먹는 게 좋을 것 같아."
작은 참새의 대답이었다. 그런데 내가 알고 있는 작은 참새의 샤워 시간은 엄청 길었다.
"참새, 씻는데 얼마나 걸릴 것 같아?"
"한 시간 정도"
"그러면 저녁이 너무 늦을 것 같은데 20분 안에 끝낼 수 있을까?"
"음~~ 그냥 밥 먹고 씻을래. 가자!"
"그게 좋겠지! 바라나시에서 가장 맛있는 한국 식당으로 고고고!"
우리는 빈 속을 채우기 위해 근처에 있는" 보나 카페"으로 갔다.
한국인 여사장님이 8년째 운영하는 "보나카페"는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인다. 한국인 여행자들이 많기도 하지만 카페 음식 맛과 서비스가 좋아 외국인들도 많다. 한국적인 실내 인테리어에 방석을 깔고 앉을 수 있는 좌식 탁자가 바라나시 속의 한국 같은 기분이 들게 한다. 석회가 많은 인도의 수돗물을 사용하지 않고 위생적인 생수를 사용해 깔끔하고 꽤 만족스러운 한국음식을 내온다.
"대박!"
참새들은 메뉴판을 보고 신세계를 만난 듯 함성을 질렀다. 짜장면부터 빈대떡, 각종 치킨까지 참새들의 식욕을 자극했다. 큰 참새는 짜장면을, 작은 참새는 간장치킨을 그리고 나는 김치찌개를 주문했다. 나는 바라나시에 다시 온 기념으로 맥주를 한 잔 마시고 싶었다. 나는 은빛 스테인리스 잔에 담겨 나오는 시원한 맥주잔을 들고 참새들은 톡 쏘는 탄산음료가 든 잔을 들었다.
"Welcome to varanasi!"
서로의 잔을 부딪쳐 바라나시 입성을 자축했다.
"수고했어. 바라나시까지 오느라고. 기특하고 고마워!"
참새들에게 정말 고마웠다. 바라나시까지 무사히 와 주어 대견스러웠다. 하루 종일 제대로 된 식사를 못한 참새들은 바라나시에서의 첫 식사에 굉장히 만족해했다. 역시 입이 즐거우면 모든 것이 즐겁다. 덕분에 참새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겨울 바라나시는 가트에 나가기 좋은 계절인 것 같다. 여름에 강가에 잠겨 있던 가트가 온전히 드러나 있었다. 건조한 바람이 불어 마른 먼지가 풀풀 날려 얼굴이 간지러웠지만 가트를 따라 걷기 좋은 계절임에는 틀림없다.
우리는 이곳에서 머무는 6 일 동안 있는 그대로의 바라나시를 느낄 것이다.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을 맞고 저녁에 지는 태양을 보며 하루 종일 가트에 나가 있어도 좋다. 강가의 사람들을 만나고 바람을 따라 노래하면 더 좋다. 무엇을 하든 참새들이 바라나시를 사랑하게 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반갑다. 바라나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