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혜강 Mar 11. 2016

엄마 딸이어서 고마워! -28

##  내 나이 예순에도 배낭을 메고 싶다.

"젊어서는  다듬어지지 않은 열정으로 세상을 만나고  나이 들어서는 후회를 다듬으며 세상과 만날 것 같다. "

 참새들과의 여행이 중반으로 접어들었다. 처음 일주일은 시간이 늘어질 대로 늘어져  더디 가는 듯했다. 그런데 여행의 삼분의 일 지점부터 가속도가 붙기 시작하더니 푸쉬카르부터는 정신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참새들은 인도와 어느 정도 친숙해진 듯했다. 아이들은 아프고 나서 자란다더니 두 녀석이 돌아가며 한 번씩 앓고 난 후  부쩍 자라 있었다.

참새들은 가끔  티격태격하기도 했다. 그러다가도  절대 떨어지지 않을  것처럼 꼭 붙어 있었다. 참새들이 서로를 의지하고 배려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행복했다. 더디 가는 여행이라도 힘에 부칠 텐데 짜증내지 않고 잘 따라와 주어 고맙고 기특했다.


 자마 마스지드에서 숙소 근처로 돌아왔지만  기차 시간은 아직도 5시간 이상 남아 있었다. 저녁을 먹기 전에 차를 한 잔 마시기로 했다. 남문 거리에는 한국음식이 적힌  입간판을 자주 볼 수 있다. "칼국수" "수제비" 등등 익숙한 한국어를 아그라에서 만나는 기분이 묘했다.


"저 많은 한국 요리가 다 가능하다고?"

참새들은 신기해하면서도 도대체 누가 저걸 다 가르쳐 주었을지 궁금해했다. 아그라에  한국요리 전문쉐프라도 다녀갔나 싶었다. 아마도 성격 좋은 한국 여행자나 한국 맛을 아는 사람의 작품 아닐까 싶다.  어디를 갈까 고민하다가 한국어 입간판이  서 있는   "조이 카페"로 들어갔다. 타지마할을 볼 생각으로 옥상으로 올라갔지만 타지마할은 보이지 않고 뽀얀 먼지가 앉은 탁자만 가득했다. 먼지를 닦던 나이 든 종업원이 메뉴판을 내밀었다.


"한국 음식 맛있어요. 칼국수, 수제비, 백숙  다 맛있어요"

하지만 저녁을 먹기에는 이른 시간이었다. 간단하게 라씨와 차를 주문하고 기다리는데 수다스러운 종업원이 우리 곁을 떠나지 않았다. 한국 여행자들의 흔적이 남아 있는 노트를 가지고 와서는 "한국 사람 많이 와요. 우리 음식 맛있다 맛있다 해요." 라고 말하며 식사를 주문할 것을  권했다. 조용히 아그라에서의 마지막을 즐기고 싶은데 매상을 올리려는 그에게  짜증이 났다.  거기다 주문한 라씨의  맛은  형편없었다.  본전 생각도 나고  심드렁해져서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 종업원도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거리에는 다양한 나라에서 온 여행자들이 가득했다. 젊은  배낭족들을 보고 있노라면 젊음이 부럽기도 하고 도전하는 모습이 아름답기도 했다. 아래를 내려다보다 우연히 우리 쪽을 올려다본   청년과 눈이 마주쳤는데 본능적으로 한국인임을 알았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훔쳐보다 들킨 사람처럼 멋쩍어 있는데  일행을 따라가던 청년이 먼저 "안녕하세요?"  하며 손을 흔들었다.  나도 살짝 손을 들어 답을 했다.  


  많은 사람들 중에  배낭을 멘 백인 여성 세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나이는 예순은 족히 넘어 보였다. 그런데 머리에 선글라스를 걸치고  민소매 티셔츠에 펑퍼짐한 알라딘 바지를 입은 모습이 싱그러워 보였다. 간혹 나이 든 배낭 여행자들을 만나면 멋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푸쉬카르에서 일흔이 다 된 나이에 배낭을 짊어진 프랑스 노부부를 만난 적이 있는데 손을 잡고 황혼을 즐기는 모습이 젊은 연인 못지않게 아름다웠다. 배낭을 메고 긴 여행을 함께 한다는 것은  서로에 대한 신뢰가 있다는 것이며 언제든 소통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젊은 시절 함께했던 여행지를 황혼의 나이에 되돌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타인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지도 한 장 들고 길을 나서는  노년의 삶!  건강한 육체와 정신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한 일이리라.  나의 예순은 어떤 모습일까?  나도 저 나이에 배낭을 멜 수 있을까?  젊어서는  다듬어지지 않은 열정으로 세상을 만나고  나이 들어서는 후회를 다듬으며 세상과 만날 것 같다. 내 나이 예순에도 배낭을 멜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함께 떠날 누군가가 있다면 더 좋겠다. 참새들과 함께 걸었던 이 길을 다시 걸을 수 있기를 기도했다.


 조이 카페의 라씨 맛이 좋았더라면 저녁까지 먹으려 했다. 하지만 우리는 만장일치로 식당을 나가기로 했다. 기차 시간은 아직 3시간이나 남아 있었다. 저녁을 먹기 위해 첫날 아그라에 도착하여 늦은 저녁을 먹었던 "TAJ"카페로 갔다.  거리엔 하나 둘 화려한 조명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주인장에게 기차 시간이 될 때까지 머물러도 되냐고 물었더니 "노 프라블럼" 이었다.


 우리는 칼국수와 가정식 백반을 주문했다. 칼국수  맛이 기가 막혔다. 양은 적었지만 쫄깃한 면발과 맛깔스러운 국물이 일품이었다. 가정식 백반을 먹던 작은 참새가 언니의 칼국수를 넘보고 있었다.  결국 우리는 칼국수 세 그릇을 추가 주문하고 기차 시간까지 거리의 야경을 즐겼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타지마할의 야경을 보기 위해  옥상에 자리를 잡고 앉아 아그라의 밤을 속삭이고 있었다.

 밤 10시 40분! 우리의 마지막 여행지 바라나시로 가는 기차가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참새들이  인도에서 다양한 기차 칸을 이용해 보길 바랐다. 오늘  우리가 탈 기차는 일반 기차의  SL(슬리퍼) 칸이었다. 한밤중에 오른 기차라  손전등을 밝히고 재빠르게 자리를 잡고 누웠다. 날이 밝기 만을 기다려야 했다. 모두가 잠든 이 밤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조용히 잠자리에 들어 단잠을 자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다시 아침이 밝아오고 기차가 잠시 멈춘 사이 기차에 올라탄 짜이 왈라들이 우리를 깨웠다. 오랜만에 따뜻한 짜이를 마시고 싶었다. 델리 이후 짜이를 마시지 못 했다. 전기포트가 있기도 했지만 푸쉬카르에서도 아그라에서도 짜이 왈라를 쉽게 만날 수 없었다.

 따뜻하고 달콤한 짜이를 두 잔이나 마셨다. 뜨끈한 짜이가 목을 타고 내려가 혈관을 데우는 듯했다.

기차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창밖으로 노란 유채꽃밭이 기차를 따라 달리고 있었다.

"인도 사람들은 타인에 대한 배려가 없다. 오로지 지금 내 앞에 앉은 내 사람들만을 챙긴다. "

"왜 저렇게 대 놓고 쳐다보는 거야?"

"신경 쓰지 마. 그냥 호기심 섞인 관심이라고 생각해"

"그래도 너무 하잖아. 알아들을 수도 없는 말을 하면서  자기들끼리 키득거리고 있잖아. 기분 나빠"

 작은 참새는 건너편에 앉은 대여섯 명의 청년들에게 눈을 흘기며 못 마땅한 얼굴을 했다. 사실은 나도 신경이 쓰였다. 청년들 뿐만 아니라 우리를 볼 수 있는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주시하고 있었다. 훔쳐보는 것도 아니고 우리 쪽으로 몸을 틀고 앉아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성추행. 성폭행이란 무시무시한 단어가 난무하는 인도였다.  온 몸의 신경이 날카롭게 칼을 세웠다.

 

 "난   개념을 상실한 저 사람들이 신기해!"

"큰 참새, 무슨 말이야?"

"저 사람들 발 밑을 봐. 땅콩 껍질과 쓰레기가 한 가득 이잖아. 이 기차를 전세 낸 것처럼 떠들면서 저러고 있잖아."

큰 참새 말대로 청년들 발밑은 아무렇게나 버려진 땅콩 껍질과 과자봉지로 쓰레기장 같았다.

인도 사람들은 타인에 대한 배려가 없다. 오로지 지금 내 앞에 앉은 내 사람들만을 챙긴다. 기차건 비행기건  일단 오르고 나면 타인에 대한 배려 없이 본전  뽑을 생각으로 판을 벌인다. 가장 편한 자세로 자리를 잡고 본능에 충실한다.


 푸쉬카르에서 아그라로 오는 기차에서 있었던 일이다. 기차가 달리기 시작하자 예닐곱 살 된 남매가 기차 안을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더구나 우리 앞에 앉은 또래의 프랑스 남자아이를 툭툭 건드리거나 앞에 가서 얼굴을 들이밀고 낄낄거리다 도망치곤 했다.

"도대체 저 아이들 부모는 뭐 하는 거야?"

"왜 사람을 보고 기분 나쁘게 낄낄거려?"

 프랑스 모자보다 참새들이 더 흥분했다.

"친해지고 싶어서 그럴 거야. 파란 눈의 아이가 신기하기도 하고....."

 참새들에게 말했지만 그들을 대변할 자신이 없었다. 부모들은 아이들을 막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오히려 프랑스 아이를 건드려보라고 시키는 듯했다. 프랑스 모자는 황당해하면서도 대책이 안 선다는 표정으로 고개만 절레절레 저을  뿐이었다. 어쩌겠는가! 이  먼 타국에서 더구나 여기는 무법천지 인도가 아닌가!


"엄마, 왜 아무도 애들한테 뭐라고 안 해? 외국인은 그렇다 쳐도 인도 사람들은 말할 수 있잖아."


 기차 안의 모든 사람들이 천방지축 뛰어다니는 인도 꼬마들을 주시하고 있었지만 아무도 말이 없었다. 왜 저들은 말이 없을까?   남의 일에 신경 쓰고 싶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인도는 계급사회라 괜히 잘못 건드려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데 굳이 내가 나설 필요가 있을까? 누구도 이 상황을 책임지고 싶어하지 않았다.

   인도는 소음에 관대했다. 도로의 공기를 찢을 듯한 경적소리에도, 한밤중에  천지를 울리는 음악소리에도 누구 하나 뭐라는 사람이 없다. 그런데 기차 안에서 뛰어노는 아이들 정도는 애교로 봐줄 것이다.  꼬마들은 장난감 장총을 메고 통로를 행진하기 시작했다. 아이의 부모들은 그 모습이 사랑스러워  껄껄껄 웃고 있었다.

"저 애들은 어디 가서 기죽지는 않겠다."

나도 모르게 혀를 찬 끝에 튀어나온 말이었다.

교육열이 높은 인도에서 부유한 가정의 아이들은 상전이 따로 없다. 자존감도 강하고 자신감도 넘친다. 인도의 한 단편이긴 하지만 기차를 탈 때마다 언제나  불쾌했다.

 일반 기차 슬리퍼(SL) 칸의 화장실은 엉망이다. 2AC 기차에서 처럼 수시로 크레졸을 뿌리고 닦는 일은 없다. 세면대는 오물로 막혀 있고 화장실은 변기 밖 까지 오물이 묻어 있고 , 뒤처리 한 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참새들은 가능하면 화장실을 가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12시간이 넘게 기차는 달리고 있었다. 한계에 부딪친 참새들이 번갈아 가며 화장실을 갈 때마다 난 그 앞에서 지키고 있어야 했다.

'저 녀석들이 아들이었으면.....'

 아들은 머리를 묶을 일도 없고 고데기를 쓴다고 싸울 일도 없을 것 같다. 화장실 문제도 쉽게 해결할 것 같고 내 배낭까지 둘러메고 앞장서 다닐 것 같다. "듬직하다. 든든하다."란 말을 달고 살았겠지! 잠시 혼자 웃고 말았다.

"엄마, 쥐. 쥐. 쥐!"

작은 참새의 날벼락같은 소리에 나는 의자 위로 다리를 올렸다. 참새들도 기겁을 하고 웅크려 앉았다. 우릴 본 건너편 인도 청년들이 낄낄거리고 웃었다.

"어딨어. 어디?"

"몰라. 분명히 봤어. 우리 의자 밑으로 들어갔어."

"의자? 그럼 혹시 배낭 속으로....?"

쥐가 배낭 속으로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배낭을 하나씩 들췄다. 작은 참새의 배낭을 꺼내려는 순간 작은 생쥐가 튀어나왔다.

"악~~~"

"어디로 갔지?"

"아직 의자 밑에 있어. 엄마 , 조심해"

참새들이 소리를 지르며 의자 위로 올라섰다.

'내가 뱀 다음으로 싫어하는 동물인데......'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다시 조심스럽게 배낭을 꺼내 의자 위로 올리기 시작했다. 마지막  배낭을 잡아 빼려는 순간 쥐방울만 한 생쥐는 통로를 가로질러 쏜살같이 사라졌다. 건너편에 앉아 있던 인도 청년들은 아직도 웃고 있었다.

 약속대로라면 기차는 12시 20분에 바라나시에 도착해야 했다. 하지만 기차는 느긋하게 겨울 들판을 감상하며 달렸다.

3시 20분!   창밖으로 "바라나시(Varanasi)"라는 글자가 보였다. 드디어 바라나시에 왔다.나는  다시 미친 바라나시에 왔다.  바라나시는 우리에게 어떤 기억을 선물할까? 바라나시의 맑은 바람이 코끝에 닿았다. 강가강을 만날 생각에 가슴이 설레였다.



작가의 이전글 엄마 딸이어서 고마워!-27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