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의 시간을 가져봐!
" 너의 시간을 가져봐!"
바라나시에서는 특별히 할 일이 없었다. 새벽에 한 시간 정도 배를 타고 나가 강가에 발을 담그거나 반쯤 누운 편한 자세로 일출을 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배에서 내리면 천천히 계단을 올라가 시장통에 있는 짜이 왈라에게 5루피를 주고 달콤하고 따뜻한 짜이를 한 잔 마셨다. 그다음엔 가트를 거닐다가 자리를 잡고 앉아 명상을 하거나 가트의 사람들과 침묵으로 소통했다.
참새들은 늦잠을 잘 때도 있었고 일찍 일어나 따라나서기도 했다. 돌아오는 길에는 우리가 묵고 있는 우르바시 게스트 하우스 맞은편에 있는 유명한 독일 빵집에서 20루피의 빵과 40루피의 레몬 생강차를 포트로 주문해 아침을 먹었다. 갓 구운 빵은 맛있었고 주전자에 담긴 레몬 생강차는 감기 기운이 있는 몸을 덥히기에 충분했다.
바라나시에서의 셋째 날!
참새들에게 미션을 주기로 했다. 미션 제목은 "너의 시간을 가져봐!"였다.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혼자 지내보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무엇을 하든 상관없었다. 지나가다 서로 마주쳐도 알은체만 하고 지나치기로 했다. 자기가 원하는 하루를 보내다가 6시에 보나카페에서 만나 저녁을 먹기로 했다. 우선 참새들에게 4000루피씩을 주었다. 콜카타에선 선물을 살 시간도 없고 실크가 유명한 바라나시에서 쇼핑을 해도 좋을 것 같다고 귀뜸을 해 주었다.
"절대로 사람들이 주는 것을 함부로 받아먹으면 안 돼. 함부로 사람을 따라가서도 안돼. 먼저 다가오는 사람은 대부분이 사기꾼이라고 생각하면 돼. 돈은 두어 군데 분산해놓고 사람들 보는데서 꺼내지 말고 휴대폰도 꼭 가방에 넣고 다녀. 무엇보다 어디를 가든 당당하고 꼿꼿한 걸음을 걷도록 해! 축 늘어져 있음 방심했다는 걸 금방 알아! 너희들은 모르지만 며칠 우리를 지켜본 사람들은 너희들이 혼자라는 걸 금방 아니까 주의해야 해!"
잔소리는 해도 해도 끝날 것 같지 않았다. 걱정이 되면 내보내지 않으면 그만이었지만 바라나시에서 하루쯤은 참새들의 시간을 갖도록 해 주고 싶었다. 녀석들이 어떻게 하루를 보낼지 궁금하기도 했다.
작은 참새는 일찌감치 숙소를 나섰다. 어제 산 펀잡의 바느질이 엉망이라 다른 옷으로 바꾸고, 친구들과 가족들에게 줄 선물도 산다고 했다. 꼼꼼하게 해야 할 일을 적은 종이를 들고 숙소를 나서는 녀석은 씩씩했다. 숙소를 나서며 우리들에게 가장 인상깊은 3분 짜리 동영상을 찍어 오라는 미션까지 주고 갔다.
반면에 큰 참새는 정오까지 늘어지게 자고 일어나더니 느지막이 숙소를 나섰다. 우선은 모나리자에 가서 아침을 먹고 무엇을 할 지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나는 몸살 기운을 잠재우느라 아침을 먹고 들어와 침대에 누웠다. 바라나시에 도착하자마자 긴장이 풀리더니 그 자리를 몸살 기운이 차고 들어왔다. 이틀은 간신히 버텼는데 영 몸이 좋지 않았다. 그 어느때보다 뜨근한 온돌이 그리웠다.
잠시 누웠다가 가트로 나가는데 큰 참새가 수공예 팔찌 가게에 앉아 있었다. 한국 여행자들과 함께 였다.
"엄마!"
큰 참새는 즐겁고 활기차 보였다. 나는 큰 참새와 학생들에게 잠시 알은체를 하고 지나쳐 왔다. 좀 더 가다 보니 작은 참새는 향가게에 앉아 주인과 흥정을 하고 있었다. 역시 짧은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참새들은 아직 하루에도 몇번씩 오가던 골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을까?"
나는 남쪽 가트를 따라 천천히 걷기로 했다. 가트에 면한 높은 성벽에 그려진 벽화들이 눈길을 끌었다. 사다리에 올라 벽화를 그리는 청년을 한참 바라보기도 했다. 그림을 좋아해선지 가트의 젊은 화가들 앞에서도 걸음을 멈췄다.
하라슈찬드라 가트에서는 난간에 기대 불꽃에 휩싸인 시신이 재가 되는 것을 지켜보기도 했다. 개들은 재를 걷어낸 자리를 차지하고 누워 단잠을 자고 있었다. 갑자기 매캐한 연기를 피해 스카프로 입을 가리면서 까지 이름모를 망자의 마지막을 지켜보고 있는 내 자신이 우스웠다.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가트는 도회적이고 정리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가트에 앉아 데이트를 즐기는 젊은 여인들과 가트의 작은 카페들은 젊은 기운이 넘쳐났다. 연을 날리는 아이들과 경사진 가트의 성벽에서 미끄럼을 타는 아이들, 그리고 교실 밖으로 나온 아이들이 생동감 있게 다가왔다.
한 시간 정도 걸어 아시 가트에 도착했다. 여름에 왔을 때 가트가 완전히 물에 잠겨 볼 수 없었던 곳이었다. 밀집한 군중들과 반짝이는 태양에 반짝이는 은빛 스테인레스 그릇을 앞에 두고 앉은 걸인들! 그들은 음지와 양지로 나뉜 서로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 같았다. 강가에서 불어온 시원한 바람이 사람들 사이를 빠져 나와 힘없는 나뭇가지를 흔들고 있었다.
다시 발길을 돌려 기억을 가다듬으며 왔던 길을 되돌아 갔다. 강가에 어슴프레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돌아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신발을 벗고 둥근 가트에 앉았다. 환경 미화를 나온 학생 대여섯명이 가트 주변을 청소하고 있었다. 즐겨 듣던 음악을 틀고 따라부르기 시작했다.
"구름아, 너는 어데로 가느냐. 젊음이여 푸르름이여 젊음이여 뜨거움이여 달려 간다. "
블랙테트라의 노래가 가트의 젊음과 어울리는 듯 했다. 청소를 하던 학생들이 쳐다보았지만 나는 이 시간을 즐기고 싶었다. 가볍게 몸을 흔들고 박자에 맞춰 드럼을 치듯 무릎을 두드렸다. 구름은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푸르렀던 열아홉의 가슴으로 마흔 여섯을 살고 있는 나였다. 철없이 고독한 방랑자! 이제서야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자유가 무엇인지, 내가 꿈꾸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한 어른 아이였다. 나는 지금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일까? 가 보지 않았기에 알 수 없는 길이다. 가 보지 않았기에 가고 싶은 길이다. 그래서 나는 걸음을 멈출 수 없다.
수평선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다시 가트를 따라 올라갔다.
"엄마!"
도비 가트에 앉아 있던 큰 참새가 달려왔다. 낮에 봤던 대학생들과 함께 였다. 학생들에게 함께 해 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우리를 기다릴 작은 참새를 생각하며 발길을 돌렸다.
"엄마 아앙!"
챙겨올 것이 있어 숙소 계단을 오르는데 일층 식당에서 작은 참새가 울면서 뛰어나왔다.
"무슨 일이야?"
"엄마, 무서워 죽는 줄 알았어 엉!"
작은 참새를 꼭 끌어안고 등을 토닥여주고 있는데 게스트 하우스 주인이 나오더니 껄껄껄 웃었다.
"무서웠어? 우리 애기!"
"엉! 길가는데 내 핸드폰을 ~~ 근데 한국 사람들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뭔가 특별한 하루를 치른 듯했다. 작은 참새를 진정시키고 주인장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보나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자! 너희들의 하루는 어땠니?"
"내가 먼저 할 거야. 진짜 대박이었어!"
작은 참새는 물 한 잔을 들이켜더니 금세 웃는 얼굴로 쫑알거리기 시작했다.
작은 참새는 숙소를 나서자마자 어제 산 옷을 바꾸러 나섰다. 그런데 미로 같은 바라나시의 골목에서 옷가게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비닐봉지에 적힌 상호를 내밀고 물어물어 가게를 찾아 옷을 바꿨다. 옷을 바꾸고 나오는데 보는 사람마다 "너 옷 바꿨니?"라고 물으며 같이 걱정을 해 주었다. 그다음엔 쇼핑을 즐겼다. 친구들에게 줄 빈디와 히말라야 립밤을 사고 향과 스카프도 샀다. 쇼핑한 물건을 숙소에 갖다 놓고 나니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 있었다. 가트에 가면 엄마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가트로 향하는데 갑자기 나타난 꼬마 녀석이 휴대폰을 낚아채 달리기 시작했다. 순간 할부도 끝나지 않은 휴대폰을 잃어버리면 안 된다는 생각에 소리를 지르며 쫓아갔다.
"저 새끼 잡아라"
영어는 안 나오고 한국말로 소리소리 지르며 쫓아가는데 지나가던 인도 청년이 손가락으로 앞에 가던 소년을 가리켰다. 작은 참새가 맞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참새보다 앞서 달리기 시작했다. 소년은 가트로 도망치고 있었다. 그때 가트에 앉아 있던 한국 학생들이 인도 청년과 작은 참새가 뒤따라오는 걸 보고 벌떡 일어나 "무슨 일이야?"며 일단 소년을 막아섰다. 소년은 붙잡혔고 휴대폰은 다시 작은 참새에게 돌아왔다. 소년은 인도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흠씬 두들겨 맞았다. 인도 사람 얼굴에 먹칠을 했다는 이유였다. 그제서야 울상이 된 작은 참새가 한국 사람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사람들은 참새를 달래고 진정시켜 주었다.
"나 이제 밖에 못 나가!"
"왜?"
"옷 가게 찾느라 상인들이 다 알아보고, 휴대폰 사건 때문에 가트에 있던 사람들이 다 알아본단 말이야!"
우리는 작은 참새의 말이 귀엽기도 하고 웃겨서 키득거렸다.
"괜찮아! 내일은 스타일을 다르게 하면 아무도 모를 거야. 알면 어때? 인기 스타네!"
큰 참새도 작은 참새를 꼭 안아주며 괜찮다고 위로했다. 정말 작은 참새다운 왁자지껄한 하루였다.
"진아는 어땠어?"
"난 별로 한 게 없어. 악기 배우러 잠깐 들렀다가 두 시간 동안 150루피 주고 팔찌 만들었어. 선생님 드릴 홍차 사고 친구들 줄 엽서를 샀지. 그리곤 계속 언니 오빠들이랑 얘기했어"
"얘기는 유익했어?"
"응! 근데 언니 오빠들이 엄마가 참 대단하고 훌륭하데"
"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자기가 본 배낭여행자 중에 내가 가장 어리다네. 그것도 놀라운데 고3 올라가는 나를 데리고 인도에 온 엄마가 남다르데. 다른 엄마 같으면 공부하라고 학원 뺑뺑이 돌렸을 거래"
"그래? 엄마가 대단하 엄마가 되었구나!"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그러나 큰 참새는 진지한 얼굴로 "엄마, 고마워!"라고 말했다. 내 오른쪽 가슴이 뭉클해지더니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가꿀 줄 아는 부지런한 삶의 농부이길 기도한다."
참새들에게 공부 잔소리는 하지 않았다. 엄마의 정보력과 조부의 경제력이 있어야 성공한다는 말이 나도는 세상이지만 공부도 재능이라는 생각이다. 물론 부모가 자식에게 투자를 하면 더 좋은 길로 나갈 수도 있겠지만 쓸데없이 대학이 넘쳐나는 대한민국에서 최종학력은 돈과 시간만 있으면 딸 수 있을 것이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 물론 학벌에 대한 욕심이 있다면 말이다. 나는 아이들이 딱딱한 의자에 밤늦게까지 앉아 있길 원하지 않는다. 아이가 원한다면 모를까 모든 아이들이 공부에 매달릴 필요는 없다. 지성의 전당이었던 대학은 사라진지 오래고, 석. 박사를 따고도 학문연구는 커녕 한 달에 책 한 권 읽지 않는 대한민국이다. 꿈도 없이 대학만을 목표로 밤을 지샐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마흔 여섯이 되어서도 꿈이 뭔지 모르는 어른도 있지 않은가! 난 참새들이 꿈꾸길 원한다. 꿈을 이루기 위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고 스스로 세상에 나가길 기도한다. 문제는 언제나 일어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문제를 해결하느냐에 따라 삶의 질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무엇을 탓하기 이전에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가꿀 줄 아는 부지런한 삶의 농부이길 기도한다.
"너의 시간을 가져봐!"
참새들은 미션을 훌륭하게 수행했다.
"내일도 각자 놀까?"
라는 나의 말에 흔쾌히 좋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큰 참새는 여행지에서 만난 한국 학생들의 다양한 삶을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단다. 반면에 작은 참새는 바라나시 현지인들과 많은 얘길 나눈 것 같았다. 아마도 큰 참새보단 작은 참새가 언어에서 자유로웠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리라. 외국어가 자유로우면 여행은 더 풍요로워진다. 우리들의 하루는 매콤한 치킨과 시원한 맥주로 유쾌하게 마무리되었다. 몸살이 또다시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지만 축배를 들어도 좋은 날이었다. 참새들의 특별한 하루에 감사하며 우리들의 이야기는 끝날 줄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