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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식이 Nov 13. 2019

자연을 입은 사람들

망얀

  2007년 여름. 기대보다 우려가 앞섰던 첫 해외여행. 사실 여행이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는 일정이었다. 필리핀 마닐라에서 3시간가량 배 타고 들어간 민도르 섬. 내려서 승합차로 5시간, 또 필리핀의 전통 이동수단 지프니로 2시간여……우기의 필리핀은 그야말로 우릴 푹푹 쪄댔다. 도착한 곳에서 우릴 반긴 건 망얀. 원래 까만 건지 씻지 않아서 그렇게 됐는지 구분되지 않던 그들이었다.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하늘에게 풍년을 허락받은 농부의 심정처럼 풍성한 것일 때가 많다. 거대한 열대 야자수 나무들과, 군데군데 지어져 있는 자연 가옥, 그 옆으로 흐르는 맑다는 말로는 형용하기 힘든 냇가. 몸은 몇 시간 전부터 흐르던 땀으로 범벅이 돼 있었지만 눈에 들어온 풍경은 건기의 나무 그늘이 주는 상쾌한 바람을 느끼고 있다는 착각을 주었다. 냇가에 잠시 발을 담그고 첫 대면한 그들은 이미 다들 모여 있었다. 다른 얼굴색을 한 사람들이 신기했으리라. 그들의 눈은 우리를 주시했다. 그들의 눈에 빠져들고 있다고 느낀 건 얼마 안 되어서였다. 그런데 그 순간 더 강렬하게 반응한 건 그들의 냄새에 사로잡힌 코였다.


망얀의 평균 수명은 40세가 체 안된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이 젊었고, 그중 다수는 어린아이들이었다. 우리는 그들에게 사랑을 전달하러 왔고, 그러기 위해선 아이들을 안아야 했다. 문제는 냄새였다. 첫날 그 아이들을 안을 수 있었던 것은 안타깝게도 정신력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냄새만큼 강렬하게 남은 것은 그 아이들 한 명 한 명이 지닌 맑고 큰 눈이었다.


첫날밤 어디에도 인위적인 불빛은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은 달과 별뿐. 그 깊은 숲 속에는 달과 별, 밤낮없이 열심히 흐르는 냇가의 울림뿐이었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그 밤, 벌레보다 더 큰 벌레들의 방문에 수도 없이 잠을 깨고, 거친 바닥에 몸은 편치 않았지만 마음은 참 편했다. 잠에서 깰 때마다 들리던 물 흐르는 소리는 위로였고 거친 바닥은 어느새 너무 아늑한 자연의 품으로 변해 있었다.


우리가 하는 일은 크게 세 가지였다. 아이들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실시, 몸이 불편한 망얀들을 위한 의료봉사, 마지막으로 그들이 함께 모일 수 있는 마을 회관을 지어주는 일이 그것이었다. 내가 참여하게 된 것은 마을 회관 짓기였다. 전에 한 팀이 들어와서 건물을 거의 완성시킨 상태였기 때문에 우리에게 맡겨진 일은 지붕 제작과 페인트칠이었다. 페인트는 흰색이었다. 그들의 얼굴색과는 참 대비되는 색이었지만, 망얀의 꾸밈없는 웃음과는 참 잘 어울리는 색이었다. 


페인트칠은 망얀의 젊은 청년들과 함께 했다. 필리핀은 영어권의 국가여서 수도 마닐라를 중심으로 도시에서는 영어를 사용하지만 망얀과 같은 전통 부족들은 따갈록어라는 고유어를 사용한다. 페인트칠을 하면서 그들은 쉴 새 없이 자신들의 언어를 구사했다. 당연히 우리는 알아듣지 못했다. 그저 묵묵히 페인트칠을 할 뿐이었다. 그런데 중간중간 대화가 통하지 않는 그들과 그럼에도 함께하고 있다고 느낄 수 있었다. 그건 웃음 때문이었다. 다들 서툴러서 온 몸에 묻은 페인트를 보며 웃고, 의자를 잘못 밟아서 넘어지는 모습에 같이 얼굴을 마주 보며 웃었다. 그거면 충분했다. 그들을 우리의 언어로 이해시킬 필요도, 그들의 언어를 억지로 짜 맞춰 해석할 필요도 없었다. 마주 본 얼굴에서 묻어 나오는 웃음, 그 자체로 충분히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교감할 수 있었다.

  

그날 저녁 한 꼬마의 상처가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며칠 전에 나무의 돌출된 부분에 찔려서 상처가 났다고 했다. 깨끗한 소독이 이루어질 리 없었고, 그대로 방치해 둔 채 시간을 보낸 것이다. 이미 이마는 호두 한 알만큼 부어 있었다. 의료 봉사하시는 선생님이 고름을 짜내기 시작했을 때, 우린 모두 자신의 고름을 짜는듯한 마음으로 손에 땀을 쥐고 있었다. 아이는 아픔에 몸부림쳤고, 그 몸짓은 우리 가슴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고름을 다 짜내고 연고를 바른 채 붕대를 감고 있던 아이의 눈가엔 눈물이 맺혀 있었지만 자신의 엄마를 바라보는 눈빛에선 평안함이 느껴졌다. 아이를 꼭 안고 기도해 주었을 때 그 아이의 작은 떨림은 축복이고 평안이었다.


쪄낸 바나나, 드라이 피쉬(오랫동안 말린 물고기), 그들이 우리를 위해 준비해 준 음식이었다. 첫째 날 우리는 그 음식들을 상에 놓고 한국에서 준비한 고추장으로 전부 밥을 비벼 먹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데 망얀과 보낸 이틀이 우리를 자연스럽게 그 음식으로 인도했다. 예상대로 맛있지 않았지만 그들의 음식을 먹음으로 더 그들의 마음을 알아가고 싶다는 마음은 우리 모두가 같았다. 물론, 마음은 있으나 도저히 그 음식들을 넘기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갓 대학교에 입학한 막내 여자 청년이었다. 혀를 내두르며 막내가 꺼낸 것은 한국에서 가져온 참치 캔이었다. 


다음날 아침, 처음 들려오는 것은 냇가의 물 흐르는 소리도, 새의 지저귐도 아니었다. 땡그랑땡그랑 왠지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의 진원지는 바로 한 꼬마 녀석이 실에 매달아 땅에 끌고 다니는 참치 캔이었다. 정말 한 10분간 우린 아무 말도 않은 채 그 아이를 쳐다봤다. 어제 막내가 다 먹고 버린 참치 캔이 망얀의 한 아이에게 놀이기구가 되어 있던 것이었다.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쓰레기통에 버린 쓰레기가 한 아이에겐 다른 의미가 되어 있던 것이다.


떠나오던 날 아침 사십여 명의 모든 부족민들이 우리를 배웅하러 나왔다. 우리의 활동들이 그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하나같이 큰 눈동자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한 명씩 한 명씩 꼭 껴안았다. 그들의 체취는 더 이상 냄새가 아닌 향기였다. 자연을 머금은 향기. 유독 더 친해졌던 오깡이라는 친구가 직접 만들었다며 팔찌를 선물로 건네주었다. 그 팔찌를 직접 채워줄 때 느껴지던 오깡의 마음은 어쩌면 이번 여정의 가장 큰 수확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봤다. 손바닥만큼은 하얗던 그들이 흔들던 아쉬움의 손짓은 발길을 옮기는 것에 애를 먹게 할 만큼 진실하게 느껴졌다.

 

십여 년 전 그 날의 느낌과 감정은 여전히 지금의 나와 가깝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소유하려 하고, 그것이 마음먹은 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 오는 분노, 허탈함이 우리 삶을 지배한다. 그 일상에는 분명히 공격 대상이 필요하다. 나보다 약한 사람이든,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든 우리는 공격 대상에게 책임을 전가하므로 잠시 잠깐의 강요된 안식을 움켜쥔다.  


망얀족을 만난 건 행운이었다. 내 탓, 네 탓에 지친 체 침전하던 일상에 조심스레 꺼내본 십여년 전의 기억으로 다시 자연이 입혀지고, 그들의 까무잡잡한 피부가 칠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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