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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식이 Nov 16. 2019

첫 월급을 함구하라!

정규직입니다만

  최저임금이 4,580원이던 2012년 첫 직장에서 첫 월급이 통장에 선명하게 기록됐다. 1,050,000원. 면접부터 월급날에 이르기까지 착한 신입 코스프레를 장착한 나는 내 월급이 얼마인지에 대해 한 달간 궁금하나 궁금해하지 않았다. 직장 선배 그 누구에게도 월급에 대한 물음은 던지지 않았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네'를 연발하며 신입사원의 본분에만 충실했던 것이다.


첫 월급날은 아침부터 분주했다. 인터넷 뱅킹으로 수도 없이 통장 잔액을 확인하고, 입출금 내역을 샅샅이 뒤졌다. 월급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내지 않았기에, 누구도 당일 퇴근 시간 즈음에 월급이 들어오는 전통에 대해 귀띔해 주지 않았다.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첫 월급 프로젝트를 머릿속에 프레젠테이션하고 스스로에게 동의를 구하며 지지리 궁상맞았던 긴 대학시절의 빈곤을 추억하기도 했다. 막내의 첫 월급 주머니에서 어떤 퍼포먼스가 벌어질지 은연중에 궁금해하던 가족들 생각도 빼놓지 않았다. 


잔액을 확인하고 집으로 가는 1001번 버스 안에서 한 달간 날랐던 수 만권의 책이 떠올랐고, 창고에서 키우던 보더콜리 '엠버'의 처지를 안쓰럽게 여겼던 나 자신이 손에 꽉 잡힌 동그랑땡 반죽처럼 으스러졌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첫 월급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을 그리던 내가 월급의 액수를 어떻게 하면 가족들에게 숨길 것인지에 대한 '위기관리 지침'에 대한 생각으로 바빠졌다.


그리고 시작된 '셀프디스'. 29년 인생을 평가절하 하기 시작했다. 


지방대 국문과 나와서 뭘 바라냐, 취직한 거 자체가 기적이야. 백오만 원도 너한테 과분해. 누굴 탓해. 다 너 때문이야. 이 똥 멍청이!


그 날 저녁, 가족 중 그 누구도 막내의 첫 월급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평소처럼 밥을 먹고, 티브이를 보며 대화를 했을 뿐. 그러나 나는 철저하게 스스로 유리됐다. 아무도 가족과 나를 분리시키지 않았지만, 공무원 누나들 옆에 앉아 혼자만 다른 생각을 하고 있던 것은 분명했다. 먼저 조용히 방에 들어가 갚아야 할 돈과 부모님 선물 살 돈을 헤아려 보고 천정을 보고, 다시 헤아려보고 창 밖 보기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엄마가 방문을 열어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하신 한마디에 옆통수가 뜨거워졌다.


아들~~ 한 달 동안 너무 수고 많았어. 엄마는 아들이 취직해서 너무 좋아


하루 종일 종횡무진 머릿속을 누비던 생각들이 그제야 조금 수그러들었다. 내일부터 회사를 나가지 말까? 했던 무책임한 마음도 잦아들었다. 그로부터 3년여를 같은 회사에서 일했고, 월급은 크게 오르지 않았다.


여러 해가 지나 인생 첫 월급 액수에 대해 아내와 지인들 여럿에게 무용담처럼 털어놓기도 했지만, 부모님과 누나들에게는 여전히 털어놓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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