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식이 Nov 15. 2019

왜 이제야 오셨나요

의사의 논리

왜 이제야 오셨나요?


  검사 결과를 모니터로 들여다보던 의사는 무던하게 한 마디 던졌다. 왜 이제야 오셨냐고? 얼른 대학병원 안과 1번 방을 뛰쳐나가고 싶게 만드는 물음이었다.


하루 종일 날파리 비슷한 것들이 나를 쫓아다녔다. 마치 환상 같아서, 날파리들의 세상에서 내가 잠시 불청객이 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앉아도, 서도, 누워도 그 증상은 똑같았다. 눈 앞에 검은 점들이 산산이 부서지고, 눈동자의 방향에 따라 유유히 상승과 하강을 반복했다. 엄마는 비문증을 이야기했다. 일명 '날파리증'. 엄마도 나이 들면서 가끔 눈 앞에 날파리 같은 것들이 날아다닌다고 했다. 8년 전 처음으로 복잡한 검사들을 마치고 의사에서 들은 병명은 '망막 출혈'


망막 뒤쪽으로 출혈이 있습니다. 불 필요한 혈관들도 자라나는 것 같고요. 기름기 있는 부유물들도 있습니다. 노년에나 나타날 수 있는 증상인데...... 당장 손을 쓸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조금 불편해도 사는 데 큰 지장은 없으실 겁니다. 갑자기 안 좋아지거나 하면 바로 병원으로 오세요


갑자기 안 좋아지면 병원으로 오라는 말이 그 당시에는 쉽게 잡히지 않는 말이었다. 안 좋아져서 가면 무슨 소용이 있나 싶기도 했지만, 당장 돈이 많이 든다는 안과 치료를 보류할 수 있어서 걸음을 무겁게 하고 집으로 돌아오지는 않았다. 날파리들이 격정적으로 날아다닐 때면 마음 한 켠 불안 세포들이 활발히 몸 안을 누비는 느낌이었지만, 의사의 말대로 불편함도 적응이 되니 사는 데 큰 어려움을 느끼지 못했다. 그렇게 8년여를 날파리들과 불편한 동거를 이어갔다.


일요일이면 농구를 했다. 잘하지 못해도 열심히 뛰어다니기 좋은 운동이 농구다. 물론 코트를 왔다 갔다 누비다 보면 공이 얼굴에 부딪히기도 하고, 손가락에 직격을 가해 탈골이 되기도 하는 과격한 운동이다. 그 날 오랜만에 동생들 여럿이 합류했다. 세 팀을 만들어도 될 정도의 인원이 모였고, 경기는 어느 때보다도 치열했다. 친구가 다리를 접질렸고, 누군가의 검지가 퉁퉁 부었다. 그리고 누군가의 손이 내 오른쪽 눈에 직격탄을 가했다.


다음 날 비대해진 날파리들의 동작이 확연히 줄어들었다. 느려진 만큼 둔해지고 움직임이 적어지다 보니 오른쪽 눈 앞으로 보이는 바깥의 공간이 좁아졌다. 안 좋아지면 오라는 의사의 말에 충실히 따랐다. 바로 예약을 잡고 지난한 검사를 마치고 의사 앞에 앉았다.


왜 이제야 오셨냐는 의사에게 '안 좋아지면 오라면서요!'라고 따지지 못했다. 출혈이 더 심해져 시야를 많이 가리게 됐다는 1번 방 주인장의 말에 낮은 한숨만 내쉬기도 버거웠기 때문에. 온갖 잘못될 경우의 수들이 나열되어 있는 책임 회피용 수술 동의서처럼 그 책임은 온전히 환자인 내 몫이 됐다.


이제 정기적으로 오셔서 관리받으셔야 합니다      


더 안 좋아지면 병원에 들러야 했던 내 눈이 이제 정기적으로 관리받아야 하는 눈이 된 것이다.

이전 07화 남에게 피해 주지 않는 삶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