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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식이 Aug 21. 2017

흑백, 생경함과 익숙함의 사이

흑백에 대하여

그렇다. 흑백은 단순한 무채색으로 설명될 수 없다.


새로나올 책의 디자인 회의를 하다보면 그 디자인이 갖는 색감에 온통 관심이 쏠린다. 책이 담고 있는 내용들을 어떤 색감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가 주요 회의 내용이다. 때로 무심한 블랙을 쓰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다양한 종류의 색상을 사용하고 또는 화려한 색상들을 조합해 '별색'을 구현해 내기도 한다. 결국 책에는 어떠한 '색'이 입혀지게 된다. 그것이 어떤 색이든지.


경남 남해에 위치한 '남해의 봄날'이라는 출판사가 있다. 직접 가보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대표의 페이스북을 둘러보고, 출간된 책들을 사보며 정체를 다 파악하기 어려운 동경심이 생겼다. 지방에 있어서? 출판사 이름이 네 성향과 맞아서?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일단 책들의 제목에 개인적으로 호감가는 단어들이 사용됐다. <작은 책방, 우리 책 쫌 팝시다>, <작은 출판사, 우리 책 쫌 만듭시다>,  <동전 하나로도 행복했던 구멍가게의 날들>, <나는 작은 회사에 다닌다>. '작은', '구멍가게', '동전' 같은 단어들을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나이가 된 것인지 이제 너무 생경한 단어들로 대접받고 있는 형국이어서 그런 것인지... 마음 팍에 와서 폭신하게 안겼다. 그리고 여전히 "이 출판사의 책은 사본다."는 기조(?)를 유지하여 신간을 기다리는 중이다. 


흑백 티브이 세대도 아니고, 컬러를 입힌 신문만 펼쳐봤었다. 흑백을 접하면서 살았던 세대가 아니었다. 더 정교하고 더 화려하게 만들어진 세상에 더 익숙하게 살아왔다. 대학을 국문과로 진학하면서 디지털보다 아날로그에 더 관심을 갖는 것이 당연한 삶이 되었던 것 같다. 수업 시간은 생각하고, 생각한 것을 글로 써 내려가는 과정이었다. 레포트 작성을 컴퓨터로 하는 것을 빼고는 디지털 기기의 정교함이 구지 필요 없는 나날이었다. 소설을 써도, 시를 써도 그 테마가 '화려함'이었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소설을 구상하고 시상을 떠올리는 과정은 흑백과 더 가까웠다. 멈춰서서 생각하고, 읽고, 멈추는 과정의 반복이었다. 화려한 색조를 입혀야 된다는 필요성을 느끼기 어려운 과정이었다. 그렇게 내 시선에 담긴 세계의 색채는 점점 옅어져 갔다.


디자이너들은 원하는 색을 구현하기 위해, 색과 색을 배합해 '별색'을 만들어 낸다. 그 처럼 우리는 색과 색을 배합해 내는데 관심이 많다. 어떠한 색에, 또 다른 색을, 그 색상에 또 다른 세계를. 흑백의 매력은 그 반대에서 찾을 수 있다. 색을 빼내는 일. 내게서 내가 아닌 것을 걸러내는 일. 사람들이 카메라 어플의 흑백 필터를 가끔 사용하는 것도 어쩌면 색감이 후퇴한 곳에 서 있는 장면에 대한 상상 때문은 아닐까. 


발만 맞춰갈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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