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 레바논 베이루트 신엘필에 이스라엘군이 공습해 연기가 구름처럼 솟아오르고 있다. 이곳은 이스라엘과 헤즈볼라의 격전지다.(사진 출처: 로이터 연합뉴스)
요즘 매일 이스라엘-헤즈볼라 전쟁 이야기가 일간지 1면에 실린다. 무력 충돌이 끊이지 않는 중동 정세가 어제오늘 이야기만은 아니다. 그래서 다들 더 무감각해져 버린 면도 있다. 이 순간 영화 「그을린 사랑」(2010)은 다시금 불러들여진다. 와즈디 무아와드가 2003년 발표한 희곡 「화염」을 각색했다. 그는 레바논에서 태어나 내전 때문에 외국으로 거처를 옮겼다.
영화 「그을린 사랑」스틸 사진(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첫 시퀀스다.
첫 시퀀스. 라디오헤드 「You and Whose Army?」와 함께, 삭발당하는 한 소년의 눈으로 빨려 들어가듯 전진하는 카메라. 노래 제목 그대로 너의 군대(혹은 군인)인가, 아니면 누군가의 군대인가 영화는 묻는다. 그리고 카메라는 소년의 눈과 동기화한다. 어머니의 수수께끼를 풀려는 자녀들의 이야기면서, 진실에 관해 아무것도 모른 채 행동하던 소년의 이야기기 때문이다.
영화 「그을린 사랑」스틸 사진(사진 출처: 네이버).
어머니 나왈이 사망하고 쌍둥이 남매 잔느, 시몽이 모였다. 나왈을 비서로 고용해온 공증인 장이 유언을 집행한다. 시신을 관에 넣지 말고 엎어놓은 채 매장해 달라는 내용. 다만, 남매의 아버지와 형에게 각각 편지를 전달하면 제대로 장례를 치러도 된다. 그런데 아버지는 전쟁에서 사망했고 형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영화 「그을린 사랑」스틸 사진(사진 출처: 네이버).
나왈은 뿌리 깊은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난민이자 연인 와합과 도망치려다 형제들에게 들킨다. 가문을 더럽혔다는 이유로 와합은 살해당하고 그도 명예살인 당할 뻔하다가 겨우 살아남는다. 연인 사이에서 생긴 아이를 낳고 아이는 기독교계 고아원에 맡겨진다. 그는 죽임당하지 않고자 대학에 진학하고 학보사 활동한다. 기독교인이지만 난민 추방에는 반대한다는 논조를 밝힌다. 그러다 대학까지 탱크가 들이닥치고, 아들을 찾으러 남부로 떠난다.
누구든 어떤 인물의 자리에 놓일 수 있다 영화는 레바논이라는 국적을 지우고 보편성을 갖는다. 누구든 등장인물의 자리에 놓일 수 있음을 위해서다. 그러면서 기독교와 이슬람교 간 갈등은 명확히 묘사한다. 이스라엘-헤즈볼라 전쟁의 씨앗인 레바논 내전을 다루면서도 모든 이가 당사자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근래 영화의 존재감이 더 커지는 이유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으로 말미암아 팔레스타인인들이 추방당한다. 이들 중 일부가 레바논으로 이주한다. 기독교인 비중이 크던 레바논에 이슬람교도가 다수 유입돼 혼란이 초래된다. 레바논은 모자이크 민주주의를 추구해왔기 때문이다. 수많은 종파가 공존하고 있는 상황, 1943년 국민협정(National Pact)으로 대통령은 기독교 마론파, 총리는 수니파 이슬람, 국회의장은 시아파 이슬람에서 선출되며 국회의원 의석도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각각 비율을 맞춰 배분된다.
영화 「그을린 사랑」스틸 사진(사진 출처: 네이버).
1964년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Palestine Liberation Organization. PLO)가 창설, 레바논 포함 각지에 본부를 두고 이스라엘을 공격한다. PLO와 레바논 내 기독교·이슬람교 등 다양한 주체들의 갈등으로 1975년 레바논 내전이 시작됐다. 영화는 레바논 내전의 불씨였던 1975년 4월 베이루트 버스 대학살(Beirut Bus Massacre; Ain el-Rammaneh incident) 사건을 비롯해 내전 당시 사건들을 각색했다.
1982년 이스라엘은 PLO를 소탕하기 위해 레바논을 침공, 수도 베이루트까지 진격한다. 이런 이스라엘의 행보에 반발해 시아파 무장정파 헤즈볼라가 창설됐다. 증오와 분노의 연쇄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영화는 간절하게 외치지만, 아마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남 일이 아닌 내 일처럼 받아들이려는 마음으로 영화 보기를 권한다. 그러면서도 수학자인 잔느가 마주한 콜라츠 추측의 잔인한 증명 과정은, 묵직하고 답답한 여운을 준다.
영화 「그을린 사랑」포스터(사진 출처: 네이버).
+ 3년 전 이 영화에 관해 글을 썼다. 지금 다시 보니 어떻게든 이 영화의 매력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싶어 문장을 길게 늘리는 글이었다. 지금 글을 쓰는 태도는 정반대인 것 같다. 언젠가 원작을 읽은 뒤 비교하면서, 이 영화에 관한 총체적이고 더 면밀한 글을 쓰겠다고 마음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