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인번호 1004'

- 죽은 자는 말이 없다. -

by 코끼리 작가

엄세호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공사장에서 일을 마친 후 무거운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대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방문 틈에서 김태우의 웃음소리와 함께 나지막한 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당신, 어떡할 거예요?’‘뭐를?’‘저 방에 있는 엄 씨 아저씨, 다음 달에 집나 가겠다고 보증금 빼 달라는데?’ 김태우 내외가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엄세호는 귀를 쫑긋 세우고 자신의 방 문 앞에서 두 사람이 하고 있는 대화를 계속 들었다. ‘놔둬!’‘지가 알아서 하겠지.’‘나는 돈도 없고, 그리고 방값도 저렴하게 해 주었는데, 마치 통보하듯이 나한테 돈 내놓으라 하면, 내가 우짜라고?’ 김태우는 절대 엄세호의 보증금을 줄 수 없다는 강변이었다.

‘그래도. 세입자가 더 이상 집에서 살기 싫다고 나가겠다는데, 방을 빼줘야죠.

거기도 자기 입장이 있어서 그러는 건데….’‘글쎄, 난 돈 없고, 돈 달라고 하면 지가 나를 죽이던지, 살리던지, 알아서 하라 해. 난 못주니까!’ 엄세호는 방문 사이로 흘러나오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뒷골이 당기면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으흠!’ 엄세호는 애써 태연한 척을 하며, 자신이 왔다는 신호의 표시로 헛기침을 하였다.

그 소리를 들은 김태우가 방문을 열며,‘엄 씨 아저씨 왔어?’‘예….’‘오늘 일찍 왔네?’‘예, 다음 달 이사 가려면 짐 정리도 틈틈이 해야 하고, 갈 준비도 해야죠….’ ‘이사?’‘예!’‘참! 말씀드린 보증금은 언제 주실 건가요?’‘보증금을 빨리 빼줘야 내가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든지, 이사 갈 곳을 찾아보던지 할 거 아닌겨?’

엄세호는 김태우 내외가 나눈 이야기를 들었기에 일부러 보증금 이야기를 꺼내려고 ‘우문현답(愚問賢答)’을 하였다.‘나 참! 그 이야기 또 카네?’‘어이, 이봐! 엄 씨….’ ‘내가 분명히 말했는데, 보증금 난 못준다고, 아니, 내가 돈이 없어서 줄 수가 없어!’ ‘그럼, 내는 어떡하란 말 이니까?’‘집을 나간다고 수십 번도 더 이야기했는데, 보증금을 안 빼준다면... 대체 어떤 심보세요?’ 김태우의 말에 엄세호는 화가 치밀어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분명 보증금 못 빼주고, 당신이 집 나가려면 짐 빼서 나가든지... 그건 당신이 알서 하시오. 내는 눈에 흙이 들어가도 보증금 못주니!’ 김태우도 엄세호의 말에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강한 어조로 이야기를 내뱉었다.‘이 영감이! 진짜로...’

‘내가 그동안 많이 참고 참았는데, 완전 배째 라식이네!’‘당신, 보증금 없으면 당신 뱃속에 신장이라도 꺼내 팔아서 돈 가져와야지?’‘안 그러면 가만히 안 둘 테니.’ ‘뭐라고?’‘이 새끼가, 정말 죽으려고 환장했나!’ 김태우는 엄세호의 비아냥거리는 말을 듣고는 방문을 박차고 나왔다. ‘너, 이 새끼! 진짜 죽고 싶어?’ 김태우의 목청에서 품어 나오는 말이 섬뜩한 살기가 느껴졌다.‘그래, 죽고 싶다. 어쩔 긴데?’ 엄세호는 김태우의 강한 어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해 볼 테면 해보라는 식으로 맞대응을 하였다.

김태우는 두 눈을 부라리며 엄세호의 목젖을 두 손으로‘꽉’ 잡았다. 김태우는 80대의 나이이지만, 특수부대 출신인 데다, 키가 180cm가 넘는 거구여서 웬만한 20대 청년보다 아구 힘이 좋고 강골이 살아있는 노인네였다.‘꽥꽥...’ 엄세호는 김태우의 목누름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엄세호는 사력을 다해 김태우의 손아구에서 빠져나오려고 발버둥 쳤다.

김태우는 엄세호를 땅바닥에 넘어뜨리고 몸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는 정신이 혼미해져 가고 있는 엄세호의 목덜미를 계속 누르고 있었다.

엄세호의 따뜻한 목울대와 달리 김태우의 손은 싸늘하고 차가웠다.

엄세호는 김태우 덩치의 무게를 못 견디겠다는 듯 마지막 발악의 비명을 질렀고, 이내 동공이 풀리더니 곧 손이 아래로‘툭’ 떨어져 내렸다. 김태우는 주검이 된 엄세호의 동공이 풀린 눈을 바라보니,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 26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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