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을 아는 존재의 걸음'
언젠가부터 시간은 시계 속에 있지 않고, 내 마음속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젊은 날의 시간은 넉넉했다. 하루는 길었고, 일 년은 아득했다.
“언젠가”라는 말은 미래를 담보하는 약속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시간은 손에 쥔 모래처럼 스르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하루가 쏜살같이 지나가고, 계절은 눈치도 주지 않은 채 바뀌어 버린다. 그리고 문득 고개를 들면 또 한 해가 저물어 있다.
친구를 만나면 자연스럽게 같은 말을 반복한다.
“시간이 너무 빠르다.”
그 말은 단순한 푸념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어떤 감각, 삶의 유한함을 은근히 자각하는 신호와도 같았다.
부고장을 받을 때마다 나는 잠시 멈춘다.
이름보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나이다.
숫자는 이상하게도 또렷하다.
‘조금 더 사셨어야 하는데…’
그 생각 뒤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따라온다. 슬픔이면서도, 어딘가 서늘한 두려움. 타인의 죽음은 늘 조용히 나 자신의 끝을 환기시킨다.
우리는 삶과 죽음을 선택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하루하루를 태연히 소비한다.
건강이 평생 지속될 것이라 믿고, 일상이 당연히 평온하게 반복될 것이라 여긴다.
요즘은 ‘100세 시대’라 말한다.
의술은 눈부시게 발전했고, 신약은 끊임없이 개발된다.
통계는 평균 수명의 연장을 증명한다.
그러나 숫자가 늘어났다고 해서 삶의 본질이 달라졌을까?.
'오래 사는 것과 잘 사는 것'은 다른 문제다.
아픔 속에서 연장된 시간은 축복일까?, 아니면 또 다른 형태의 시련일까?.
늙어가는 부모를 바라보는 자식들의 마음은 복잡하다.
부모는 자식에게 짐이 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자식은 부모를 외면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현실은 이상과 다르다.
병환, 치매, 요양원이라는 선택지. 사랑과 책임, 죄책감과 안도감이 뒤섞인 감정은 쉽게 말로 정리되지 않는다.
결국 우리는 깨닫는다. '오래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건강하게 존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자신을 지키는 일이 곧 가족을 지키는 일이라는 것을...
그래서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건강을 붙든다.
누군가는 식단을 바꾸고, 누군가는 운동화를 신는다.
나는 산을 선택했다.
산은 묘한 곳이다.
도시에선 느끼지 못하는 침묵이 있고, 나무와 바람은 말을 하지 않으면서도 많은 것을 들려준다.
등산은 단순한 운동이 아니다. 그것은 몸과 마음을 동시에 시험하는 의식과도 같다.
산을 오르는 길은 흡사 인생을 닮았다.
처음엔 가볍다. 발걸음은 경쾌하고, 숨도 차지 않는다.
중턱에 이르면 다리가 묵직해지고, ‘여기서 멈출까’ 하는 유혹이 스친다.
어떤 날은 유난히 경사가 가파르고, 어떤 날은 돌길이 미끄럽다.
그럼에도 한 걸음씩 옮기다 보면 어느새 정상에 닿는다.
정상에서 마주하는 풍경은 늘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바람은 차갑고, 시야는 탁 트여 있다.
내가 걸어온 길이 한눈에 들어오고, 멀리 아직 가보지 않은 능선들이 겹겹이 펼쳐진다. 그 순간 묘한 깨달음이 찾아온다.
인생도 이와 같지 않을까. 힘겨운 시간을 통과해야만 조금 더 넓은 시야를 얻는다.
오르지 않으면 볼 수 없는 풍경이 있다.
오늘, 나는 오랜 친구와 함께 서울 근교의 산을 올랐다.
우리는 땀을 흘리며 걸었고, 숨을 고르며 멈춰 섰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 사이에 많은 이야기가 오갔다. 자녀의 문제, 직장의 고민, 부모의 건강, 노후의 불안. 말로 꺼내면 가벼워지는 것들이 있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친구의 고개 끄덕임은 어떤 처방전보다 위로가 된다.
산길에서 나눈 대화는 특별한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그저 서로의 삶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그 깨달음 하나로도 마음은 한결 가벼워진다.
하산 길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오늘 하루는 하나의 작은 인생이었다고...
집을 나선 순간은 탄생과 같았고, 오르막은 중년의 분투였으며,
정상은 잠시 맞이한 성취의 절정...
그리고 내려오는 길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노년의 걸음 같았다.
그러나 하산이 끝이라고 해서 인생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또 다른 산이 기다리고 있고,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된다.
우리는 결국 오르고, 내려오고, 다시 오르는 존재다.
시간은 여전히 빠르게 흐를 것이다.
세월의 속도를 늦출 방법은 없다.
하지만 '속도와 깊이'는 다른 문제다.
빠르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도 우리는 깊게 살 수 있다.
산을 오르듯, 숨을 고르며, 옆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한 걸음씩...
어쩌면 '인생은 길이가 아니라 밀도'일지도 모른다.
얼마나 오래 살았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또렷이 살아냈는가...
정상에 몇 번 올랐는가가 아니라, 오르는 동안 무엇을 느꼈는가...
오늘 산에서 느꼈던 바람의 감촉과 친구의 웃음소리를 기억한다면,
그 하루는 결코 헛되지 않다.
그리고 그렇게 쌓인 하루들이 모여 결국 한 사람의 인생이 된다.
세월은 빠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안에서 여전히 걸을 수 있다.
넘어질 수도 있고, 다시 일어설 수도 있다.
숨이 찰 때 잠시 쉬어 갈 수도 있다.
산이 가르쳐준 것은 단순하다.
끝을 두려워하기보다, 지금의 걸음을 성실히 딛는 것.
정상에 대한 집착보다, 오르는 과정에 대한 충실함.
내일도 시간은 빠르게 흐르겠지만,
나는 다시 운동화를 묶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한 번, 나만의 인생을 오르기 시작할 것이다.
'늘 그랬던것 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