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 속 자아도취'

'꿈을 가진 코끼리'의 수필

by 코끼리 작가

날씨가 쾌청한 날이면, 간간히 짬을 내어 서울 근교 산을 오른다.

이런저런 이유로 마음이 복잡할 때 모든 시름을 잊고 생각을 정리할 겸 할 수 있는 운동은 등산만 한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간단한 등산복 차림에 마실 물도 챙기고 복장과 등산 장비까지 갖춘 후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을 나서지만, 이내 후회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등산로 초입에서 많은 등산객들을 따라 한걸음 걷다 보면 금세 피로감이 물밑 듯이 몰려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내 마음을 위로라도 해주듯 길가에 만개한 꽃들이 形形色色의 자태를 뽐내며 향긋한 꽃 냄새로 반갑게 손님을 맞이해주니 기분이 금방 상쾌해진다.

늘 다니는 코스지만 갈 때마다 새롭게 느껴지는 것은 등산을 함으로써 느낄 수 있는 묘미가 아닌가 싶다. 산 입구 매표소에서 능선을 경유하여 걷는 동안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내딛는 발걸음은 힘들지만 소나무, 참나무, 물푸레나무 등 수려한 환경에 도취되어 어느새 피곤은 싹 가시고 새로운 기운이 다시 용솟음치는 것을 느끼곤 한다.

양지바른 곳에 피어있는 다양한 종류의 꽃봉오리는 햇빛을 받아 더욱 화사하기만 하고,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산록에서는 이에 질세라 늘 푸른 소나무들이 힘껏 교태를 부리고 있다. 산 행중에 마주치는 등산객들에게 가벼운 목례를 하고 내가 지나간 흔적을 남기기라도 하듯이 나무의 중턱을 손바닥으로 치며 그렇게 산을 올랐다.

8부 능선을 지나 정상에 도착할 때면 몸은 이내 땀으로 흠뻑 젖는다. 중간중간 약수터에서 목을 축이고 다시 발걸음을 재촉한다. 산은 오르면 오를수록 힘겹게 느껴지고 정상이 머지않았는데도 성취감을 맛보기 전에 ‘이젠 그만 하산할까?’ 하는 생각이 나의 인내심을 테스트하곤 한다. 누군가 ‘인생은 산을 오르는 것과 같다.’고 한 말이 정말 정확한 비유인 것 같다.

산자락 입구에서 다 같이 저마다의 목적지를 정해놓고 산을 오르지만 정상이 다가올수록 험난한 협곡도 많다. 첩첩산중 속에 혼자 산행을 하고 있노라면 아무도 나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 암중 산속에서 외로운 자기와의 싸움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등산이 흡사 우리네 인생사와 같다는 생각을 하였다. 산행 도중 중간에 포기하게 되면 정상에서 느낄 수 있는 희열을 맛볼 수 없게 되지만, 참고 견뎌내어 정상에 오르면 온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자아도취(自我陶醉)의 기쁨을 맛볼 수 있게 되니 이래서 등산이 ‘인생의 축소판’이라고 비유했던가 보다. 산을 오르는 동안 내 앞에 먼저 가고 있는 등산객의 발걸음을 따라 걷다가 조금 더 빨리 가고 싶은 마음에 앞질러 갈 때도 있다. 하지만 어느 지점에 도달해 잠시 휴식을 취하려다 보면 뒤쳐져서 오던 등산객이 어느새 나보다 앞서가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욕심은 과욕을 부르고 먼저 앞서갔다고 결코 그것이 앞선 것이 아니라는 ‘오십보백보(五十步百步)’의 평범한 이치를 깨닫곤 한다.

산을 내려오면서 문득 행복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았다. ‘행복의 기준은 무엇이며, 어떻게 사는 것이 과연 행복한 삶일까?’, 하산하는 중간에 누군가가 나무 자락에 써놓은 글귀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병은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병’이래요. 나 자신이 가장 소중하고 행복하다고 생각하세요.”나만의 행복의 비법이 정리되는 순간이었다. 산을 오르면서 정상까지는 힘들었지만, 하산할 때의 발걸음은 너무도 가벼웠다. 비록 많은 재물을 가지지 못하고 남보다 뛰어난 명예도 갖지 못했지만, 건강하게 태어나서 하루하루 작은 것에 만족하고 단란한 가족과 알콩달콩한 삶을 영위해 나간다면, 이것이야 말로 소박한 행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高僧인 원효대사가 당나라로 유학을 가던 중, 어느 무덤 근처에서 잠을 자다가 새벽 잠결에 목이 말라 해골 물을 마셨다는 설화는 유명하다. 그 맛이 참으로 꿀맛 같았는데, 아침에 깨어나 확인해보니 해골에 고인 물이었음을 알고 구역질을 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더러운 물을 마시고도 처음에 그렇게 꿀맛이었다는 생각을 한 것에 대해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라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깨달음을 現世에 깨달음을 주고 있다.

요즘 유행하는 정서적·문화적 아이콘으로‘힐링(healing)’이란 단어가 있다. 휴가철 조용한 산사(山寺)를 방문하여 시간 보내기, 며칠 동안 핸드폰을 꺼두고 전화의 고통에서 해방되기 등 나만의 힐링 프로그램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이 증가하고 있다 한다. 바쁜 일상 속에서 느림의 미학으로 나만의 시간을 가져보는 것이 꼭 필요한 시대이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세상은 좋아졌는데 행복하지 않다고 한다. 여러 가지 저마다 이유가 있겠지만, 큰 욕심 안 부리고 작은 것에 만족할 줄 알고 긍정적인 생각으로 건강하게 살아간다면, 그것이 바로 가치 있는 진정한 행복이 아니겠는가? 산속에 핀 철쭉도, 진달래도 화사함을 뽐내지만, 그것을 단순히 꽃으로만 보고 그냥 스쳐 지나간다면 아름다운 꽃의 자태도 향기도 맡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하산하는 중에 길가에 옥수수를 파는 할머니가 있어, ‘할머니... 옥수수 한 개만 주세요. 많이 파셨어요?라고 물었더니, 할머니는‘지금 파는 게 마수예요. 그냥 맛이나 보시오 …….’ 하면서 덥석 옥수수를 한 개 주었다. 옥수수 한 개에 대한 값을 드리려고 해도 이내 계속 사양하신다. 그래도 어머님 같은 할머니가 옥수수를 팔고 있는 모습이 안쓰럽고 맛있는 옥수수를 먹은 대가로 감사의 마음을 담아 할머니의 손에 돈을 쥐어 드렸다. 상쾌한 날씨와 더불어 깨달음이 있는 즐거운 산행이었고, 할머니의 따뜻한 마음씨는 덤으로 얻은 행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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