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입
그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색이 진해 뚜렷하다 못해 한데 폭발할 지경이었다. 화려한 색채를 뿌려놓은 듯한 본새에 먹색을 군데군데 뿌려놓았으므로, 검은 모자를 눌러썼지만 가녀린 곡선은 숨길 수 없다. 길 위에서 그는 걸음폭은 좁고 위태롭다. 주변의 시선에 몸을 움직이면서 자연스럽고 또 부자연스럽다. 모순투성이에 눈길이 간다.
그가 나를 이끌었고 나는 자연스레 이끌렸다.
알록달록한 부라노섬을 함께 걸었다. 짤막한 대화도 나눴다. 한 시간이 일 년인 것처럼 편안했다.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 같았고 서로를 닮아 있었다. 열매가 무르익으면서 나뭇잎은 싹을 틔우기도 저물기도 한다. 서로를 뒷받침하는 무언의 묘기. 걸음걸이. 자세. 눈빛. 행동 하나하나가 선명하다.
사랑이란 묘약 없이도 잘 살 수 있다는 착각을 하는 이와 사랑이면 된다는 생각을 가진 이. 좁은 골목길에서 카메라 소음만이 침묵을 깨부수었다. 중국어와 한국어는 출생지를 의미할 뿐. 영어도 막을 내렸다. 한치의 동요 없이 진정했다. 불안한 상대는 입을 열게 하고 편안한 상대는 입을 닫게 한다. 압박에도 무언으로 있을 수 있었다. 또 그러다 보니 지겨웠고 싫증 났다.
우리는 계획했던 대로 움직였다. 정오가 되면 본섬에 들어가 가벼운 파스타를 먹는 것이다. 부라노섬은 작았고 사람으로 북적였다. 그가 걸친 거라곤 손에 든 비닐봉지가 다였고 거친 매무새는 한 마리 학처럼 곧고 우아했다. 내가 메고 다닌 해진 셀린느 백보다 쿨했다.
수상버스를 타고 부라노섬에서 본섬에 도착했다. 이탈리아스러운 레스토랑은 아무래도 부담된다며 3분 파스타가 어떠냐고 물었다. 내가 연인한테 하는 행동 같아 들리지 않게 피식했다.
’이탈리아에서는 어떻게 먹어도 맛있군.‘
입 밖으로 내뱉었다. 중절모를 쓴 이탈리아 중년이 그려진 맥주를 한 모금 삼키니 모든 순간이 영화 같았다. 스무 명이면 터질 듯한 가게 내부에서 옹기종기 모여있다. 아기자기한 커플들. 솔로. 친구. 동행이라고 선긋기 싫은 순수한 사람. 그래서 나는 그와 함께 했다. 무뚝뚝함과 호기심을 겸비한 궁금증 요소를 속속들이 지니고 있다. 가슴에서 우러난 물음표를 던졌다. 하지만 핵심 질문은 빼놓고 뱅뱅 맴돌았다.
”지금 여자친구는 없어?“
전 여자친구 사진을 보여줬기에 타당한 질문이었다. 너무도 흔한 아시아 여성이라 가슴이 떨렸다. 레즈비언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흥미로웠고 또 조심스러웠다. 리알토 다리에서 빛바랜 폴라로이드 사진 한 장을 보여주면서 으스대던 그에게 변명이라도 하듯 남자친구 이야기를 반사적으로 꺼냈다. 두려웠다. 나와 우리의 관계가.
‘우린 영원한 친구야.’
착하고 좋은 사람이면 될까. 친구는 진부한 세상과 가장 동떨어진 존재여야 한다. 미쳐야 하고 진지해져선 안 된다. 그를 친구로 점찍었고부터 재밌기 시작했다. 가득 찬 눈과 잡생각을 할 수 없는 순간들이 일곱 살로 돌려버렸다. 그 무렵에는 엄마가 아무리 불러도 집에 가질 않았고 방과 후에는 늘 철봉에 매달려 물구나무를 섰다. 슬픈 눈동자는 흔들리는 갈대 같아 전봇대에 박힌 백열등처럼 끝끝내 꺼져버려 빛을 내지 못한다.
산 마르코 대성당을 지나 산 마르코 광장에 야외 레스토랑에서 연주하는 기타 소리에 넋을 놓고 있다 푸드덕대는 비둘기의 몸짓을 따라 운하로 향했다. 비틀거리는 그를 끼고 길을 안내했다. 값비싼 곤돌라를 피해 수상버스를 탔다. 100유로 가까이하는 곤돌라보다 여럿이 타도 편도 3유로인 바포레토를 택했다. 파도너울과 뱃사공이 뱃머리를 이끌고 가며 내뿜는 거대한 힘을 받으며 베네치아에 있음을 실감케 했다. 열악했던 인공섬의 시작과 육체노동을 해야 했던 사람들이 그려졌다. 인공섬 곳곳에 남겨진 빈 집과 까맣게 타버린 벽을 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