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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경혜 Jul 31. 2024

베네치아의 여인들 (6)

상상의 나래

파도를 따라 이동했다. 침묵만이 흘렀다. 대화의 고갈과 한계. 숨 막힐듯한 고요함에 시선은 밖을 향했다. 은빛 파도는 신의 선율을 연주하는 흑발의 하프연주자가 떠올랐다. 고개를 돌리면 저 멀리서 색소폰과 어울리는 바리톤의 음률이 흘렀다.

문득 나이가 들수록 관계에 신중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고독이 벗 같을 때 맺는 관계는 조심스러워야 했다. 단순한 호기심에 만나 끝맺음을 고민하는 사이 서로의 눈동자는 의미 없이 바빴다. 허송세월 같은 시간이 흘렀다. 사실 점점 그를 멀리하고 싶었고 감출 수 없는 눈동자와 물리적 거리를 유지했다. 사회적 거리. 시작이 있음 끝이 있어야 한다. 애지중지하는 물건이랍시고 오래가는 것은 없다. 언젠가는 사라진다. 존재와 상실은 어쩌면 무의미한 단어다. 갓 초등학생이 된 아이를 떼어놓는 어미의 심정으로 다가갔다. 감정소비보다 인간적인 매력이 깊게 오지 않았다.


다시 본섬에서 메스트레역으로 향했다. 조용한 기차 안 모두가 충격에 휩싸였고 어쩔 줄 몰랐다.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열차 내부는 새벽공기보다 적막했고 누구도 입을 떼지 않았다. 먼저 이탈리아어로 방송이 흘러나왔고 영어가 들리기 시작했다. 본섬에서 빠지는 버스 한 대가 철도로 추락했다는 것이다. 사상자가 발생해 해당 철로를 수습 중에 있다고 했다. 예기치 못한 사고로 인해 열차는 지연됐지만 열차 안은 어떤 장례식보다 경건하고 신성했다.

뜨거운 햇살이 지평선으로 떨어지는 광경이 한 편의 모노드라마였다. 하나의 사건이 하루의 전부가 되어 열차를 감쌌다. 아무리 달려도 제자리걸음인 쳇바퀴에 갇힌 날이 선 고슴도치였다.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된 채 살아가는 누군가를 떠올렸다. 뜨거운 피를 흘리고 있음에도 미소 짓는 위대한 인간이. 그리고 부정과 함께 동요되는 동질감 때문에 위태위태한 줄다리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침묵이 걷히고 인사를 했다. 마지막을 암시하는 굳은 표정을 지으며 침대로 향했다.


그는 공용주방에서 요리를 하기 위해 만찬을 준비했다. 나는 호스텔 인근 중식당에서 음식을 포장해 먹으려 했다. 인스타그램 메시지로 저녁안부를 물었던 그에게 답장을 했다. 우스꽝스럽게도 엇갈렸던 우리는 또 한 명의 인물과 동행을 시작했다. 깜깜했던 미래에 들어온 검은 존재였다. 나흘이나 머물렀던 나는 매번 바뀌는 룸메이트들에 당혹스러웠지만 금세 또 적응했으나 한국인은 철 지난 첫사랑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과 함께 머물렀고 다음날은 근교로 떠나기로 했다.


그날 저녁은 어색하고 또렷했다. 의외로 대만인들은 남녀 간 굉장히 개방적인 관계를 갖는다는 것이다. 캐나다 배우자 비자에 명시해야 했던 부부관계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했던 때가 있었다. 한국에서 부부라 함은 결혼 후 한 사람과 평생 사는 개념인대 비해, 동거 배우자가 있는 사실혼부터 동성혼, 법률적인 혼인관계는 거리가 느껴지는 생소한 개념이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어 보이지 않는 거리에서 적당히 공감하고 들었다.

엔지니어일을 하는 어느 대만인은 승무원 여자친구를 자랑하면서 열린 관계를 자랑했다. 정확히는 연애 중에 바람피우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유교사상이 엄했던 아버지 밑에 자란 나로선 도무지 공감할 수 없었기에 고개를 끄덕이는 동시에 경멸이 따라왔다. 파렴치한 같았고 범죄자를 만난 것처럼 몸서리쳐졌다. 여자친구가 다른 사람과 섹스를 한다는 게 당연하다? “관계”라는 단어를 다시금 생각게 했다.


“카우치 서핑하면 돼!”

나는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을 운운했다. 그랬더니 또 다른 대만인이 신 플랫폼을 소개해줬다. 카우치는 잠자는 소파를 의미하고 서핑은 말 그대로 파도를 타는 서핑을 말한다. 이는 ‘카우치 서핑(Couch Surfing)’이라는 커뮤니티에서 원하는 국가의 호스트 집에 컨택해 공짜로 머무를 수 있음을 뜻한다. 실제로 많은 배낭여행가들이 애용하고 있으며 호스트 집에 머무르고 가이드까지 받을 수 있다. 물론 위험은 따르며 여자의 경우에는 더욱더 그렇다. 하지만 수많은 카우치 서퍼들의 후기를 통해 비교적 안전한 호스트의 방에 머무르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미간이 잔뜩 찌푸려진 영혼은 생각에 잠겼다. 그의 생생한 후기를 들으면서도 굳건한 생각은 변치 않았다. 또 여자 서퍼들은 의무적으로 호스트와 섹스를 한다는 이야기에 경악했지만 한편으로 이해는 되었다.


언제가 되면 진정 스스로를 정의 내릴 수 있을까. 이들의 주장에 잔뜩 얼어붙은 나는 개방적이나 닫혀있으며 머리로는 이해하되 마음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이다. 상대에게는 관대하되 자신에게는 관대할 수 없는 사람, 아슬아슬한 선 하나를 놓고 수백만 번 저울질하며 고민하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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