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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경혜 Jul 10. 2024

베네치아의 여인들 (4)

여행이란

뿌연 연기가 걷히고 맑은 하늘이 나타났다.


물질적인 가치에 의존해 살았던 날들이 후회스럽지만 지난 일이라는 것을 안다. 겹겹이 쌓인 매 순간의 파장이 될 것이다.


여행할수록 자아가 짙어진다.


자연스레 고독과 벗이 되고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갖는다. 사색과는 다른 의미로 낯선 타지에서 보내는 <여행>은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다. 여행에서 파생된 것이지만 지독하게 외롭고 성찰이 깃들여있다. 존재를 의심하면서도 그것에 의지한 채 한걸음 내딛는다. 무의식에서 의식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이방인이다. 또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이다. 자아성찰과 엮으면 또 지극히 단순하다. 생각에 빠질수록 벗어나고 싶어지는 것이다. 여행은 그 순간의 연속으로 현실을 초월하게 만든다.


밤하늘의 별이 금방 쏟아질 것 같은 포르투 거리는 사색에 빠지기 좋았다.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 세상을 등지고 벽을 바라보는 이방인을 보고 눈물을 쏟는 그런 일 말이다. 대성당으로 가는 언덕 어귀에는 유명한 파스테 지우 나따(에그타르트) 상점이 있어 북적이면서도 주말이면 벼룩시장이 열린다. 활기차고 사람 냄새가 자욱한 그 거리를 등지고 반항에 가까운 벽화만 뚫어져라 보는 축 처진 어깨를 보고 동질감을 느끼는 일. 타인에게서 자유로워진 모습에 가슴이 뜨거워진다. 생각보다 세상은 공평하게 흘러간다는 생각을 한다.


한정된 시간 속 가지각색으로 사는 세상을 담을 수 있는 것은 크나큰 행운이다. 어느새 그런 세상을 갈망하게 된다. 그래서 괴리감을 줄이지만 때론 그들에게서 따가운 눈초리도 받는다. 그렇다. 완벽한 현지인이 될 수 없다. 어디서나 현실은 냉혹하다. 빈부격차가 날로 심해지면서 경계는 살벌하고 꼽은 시선으로 보는 이들이 많다. 마치 코스프레라는 사절한다는 따가운 시선을 받는다.

그런데 그 시선이 새롭고 꽤 신선하고 자극적이다.


나는 점점 여행에 미쳐가는 중이다.



여러모로 베네치아는 다채로운 성향을 채워줄 도시는 아니었다. 여행고수들에게는 시시한 관광지일 뿐. 참 우습게도 4박을 묵은 호스텔에서 다양한 여행고수들을 만났다. 휴대폰 하나로 돈을 벌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시대적 성향에 편승하려는데 ‘디지털노마드’란 직업이 갓 탄생할 때부터 관심을 갖고 그 업을 꾸준히 잇는 친구를 만났다.


첫째 날이 저물고 새로운 여행객들로 채워지면서 또다시 혼자가 되었다. 아침이 밝아 채비를 마치고 메스트레역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담배를 물고 앞 뜰을 서성이는 여자인지 남자인지 모를 사람이 있었다. 출입구에서 흡연을 하는 일은 비흡연자에게는 무척 거북스럽다. 인상이 찌푸려진 채 평소보다 빠르게 걸어 메스트레역 인근으로 향했다.


보통 때보다 일찍 일어나 순서를 기다리다 밖을 나왔다. 아침 10시 역 앞 카페에서 따뜻한 카푸치노와 바닐라 크림이 듬뿍 들어간 크로와상을 베어 물었다. 늦어도 12시까지는 부라노 섬에 도착해야 한다. 점심시간 때가 지나면 절로 머리가 아파질 것이기 때문이다. 생각한 대로 늦지 않게 도착했다.

부라노 섬은 수상택시를 타고 경유를 해야 하는데 뜻밖의 동행이 생겼다. 도망치듯 시작된 인공섬 여행에서 그와 함께하게 되었다.


‘어떻게 또 여기서 만나지?‘


나와 그는 매표소에서 만나 부라노 섬까지 같이 가기로 했다. 다시 매표를 하고 주변을 서성이던 그를 보았고 참을 수 없었다. 결국 둘이서 긴 줄을 기다리면서 진부한 신상털이를 하게 되었다. 참 신기한 일이다. 호스텔 앞에서 만난 그를 여기서 다시 만날 줄은.


정오가 되기 직전에 선착장에 다다르니 기어코 끝없는 행렬을 이룬다. 두어 번 배를 보내고 탑승했다. 짧은 영어가 오갔지만 깊은 대화는 없었다. 사실 그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만난 사람 중에 가장 특이해서 파악하기 어렵다. 분명 레즈비언인데 시원하다. 내가 좋아하는 성향을 지녔다. 소울메이트. 친구. 애인. 섬광을 내비칠법한 단어들이 뇌리에 꽂히면서 짜릿했다. 전에 없던 신선함이 생기를 돌게 했다.

뿌리내리지 않은 세상이 궁금한 적 있었다. 그것은 종이 한 장 차이라 마음만 먹으면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쉽다. 스스로의 한계치를 시험해 보는 것일 수도 있으나 상당한 실례가 되는 일이다. 무리를 벗어나면 더 큰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렇지만 무한에도 한계는 있다. 살아온 환경의 차이고 이기의 사실 때문이다. 한 개인에게 허용된 가치는 한정적이고 머리로는 알되 가슴으로는 알지 못한다. 세상에 없던 것을 받아들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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