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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경혜 Jun 26. 2024

베네치아의 여인들 (2)

있는 그대로

카타니아 공항에서부터 혼자가 된 나는 다시 베네치아로 향했다.


재미가 빠지니 우울함의 연속이었다. 굳은 표정과 함께 내 시선은 저 멀리에 향해 있다. 포르투갈 한 달 살기 후 스페인에서 돌아올 때 만난 대만 남자가 떠올랐다. 마드리드 공항에서 말을 걸어준 바람에 버스에서 수다가 끊이질 않았다. 여고동창을 만난 듯 깔깔 웃으며 시간을 지웠지만, 지금은 적막만이 가득하다.


수많은 사람들은 나를 비켜가고 외로이 덩그러니 서있다. 공허했다.


30개국 100개 도시를 넘게 여행하면서 호스텔을 예약한 일은 새로움이다. 잊혀진 지현이를 초대한 워홀러의 오만으로 인해 결국 지현이 혼자 호스텔에 묵은 사건도 떠올랐다. 풍족함과 반비례하는 판단력이 흐려졌던 시절을 상기했다. 반지하 2평 남짓한 방구석 싱글침대에 둘이 자는 것은 가족과도 어려운 일인데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


결국엔 과거로의 회귀. 치열, 열정, 청춘 같은 단어와 멀어져 버린 것일까. 나는.


기쁨에 절어 방방 뛰던 여행가는 어느새 고립된 방랑자가 되어 있는데 무엇을 어떻게 고쳐서 두려움을 깨고 일어날까? 아니면 실패할까?


혼자만의 시간은 점점 짙어져 간다. 무수한 떨림이 깊은 한숨에 이끌려 낙오자로 이끈다. 10대 때 청아하고 순수한 것들을 채웠다면 20대에는 방랑과 시험의 시간을 보냈다. 현재를 살면서 올바른 시간 사용법을 몰라 괴로움에 빠진다. 결혼, 돈, 건강에 치우친 나이테가 그려지는 30대는 전에 없던 새로운 고민을 던져준다. 짊어질 것들에 때론 슬픔이 따른다. 구렁텅이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는 나를 위해.


내 마음이 과거를 그리워하고 있다.


작은 떨림으로, 여러 이유로, 7인실 숙소에 머무르게 되었다. 본섬과 연결되는 메스트레역 앞 버스정류장에 내려 앞을 보고 걸었다. 호스텔 가는 길이 익숙한 이유는 한국인을 자주 마주쳐서다. 앳된 얼굴을 한 누가 봐도 요즘 젊은이들이 오가고 있었다. 포르투갈은 풍경에 깃든 색감이 눈에 들어왔다면, 베네치아에서는 오직 사람에 집중하게 된다.


어느새 도착한 어색함이 감도는 침대방. 2층 침대와 1층 침대가 배치되어 있는 방 안에는 갓 들어온 방랑자와 샤워하고 있는 누군가가 있었고 자유로운 행동을 취할 수 있는 때를 간 보며 탐색을 거치고 있었다. 자동센서가 켜지는 것이 가장 괴롭게 느껴질 위치에 배정받아 입이 삐죽 나왔지만 쥐도 새도 모르게 5일 동안 몸을 혹사시키기로 다짐했다.


“Hello.”

“Nice to meet you."     


젖은 금발을 탈탈탈 털고 있다. 악마가 지정해 준 1번 침대는 샤워실과 화장실 그리고 출입문과도 가까웠다. 자연스레 눈이 마주쳐 인사를 건넸다.


상아색 피부에 붉은빛을 한 꼬집 첨가한 그녀는 주근깨가 가득한 소녀처럼 생겼다. 금방이라도 남자친구와 헤어졌다며 징징대다 다음날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행동할 것 같았다. 5년 가까이 서비스직에 종사했다 보니 외국인도 어떤 사람일지 짐작이 가는 지경에 이르렀다.

또 샐러드를 먹자는 채식주의자의 제안을 거절할 필요가 없어 밖을 나섰고, 1층 테라스에서 반짝 대화를 하며 시간을 태우고 있었다.

  

어김없이 런던 얘기가 나왔고 그녀 또한 런던에서 지냈다고 했다. 눈썹을 치켜세우더니 입을 다물지 못한다. 부연설명을 피해 갈 가벼운 관계란 생각이 들었다. 깊은 얘기를 좋아하는 나로서 보모의 이유가 궁금했다. 창창한 이십 대 초반에 런던으로 건너가 내 새끼도 아닌 남의 아이를 돌보는 일. 겉으로 봐도 쉽지 않다.


슬픔이 어려 더욱 빛나는 눈망울에 집중했다. 당장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자연스레 탁자에서 손을 뗐다.


부모의 이혼 후 독립을 위해 런던으로 넘어간 사실이 대수롭지 않았다. 예전의 나라면 나를 버려서라도 그 아픔을 다독여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진정으로 슬픔을 덮는 과정은 내면에서 시작해 외면의 변화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을 안다. 즉, 그의 선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섯 살 어린이는 잔상만 남아 강한 심지에 붙들여있을 뿐이다.

열 살 차이인 어른이 아이에게 맞춰주는 꼴일 뿐. 카이피라 같은 먹은 듯 안 먹은 듯한 가벼운 느낌이랄까. 가족이란 정의가 복잡한 서구인과의 대화는 간단한 채소 요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진실을 외면한 채 연기하는 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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