쌩쏨+마나우+탄산수=천상의 맛
쌩쏨(태국의 국민 술이라 불리는 럼주)에 대한 첫 기억은 그랬다. 꽐라가 된 이들이 하나씩 끌어안고 있는 양동이, 쌩쏨 버킷. 얼음이 가득 든 양동이에 쌩쏨 한 병에 콜라, 레드불, 탄산수를 들이부은 카오산로드 스타일 칵테일이다. 한 빨대 하는 순간 엔돌핀이 쫙 솟아오르면서 바닥을 드러냈을 무렵엔 영혼까지 털린 그 느낌은 마셔본 사람은 알 거다. '방콕, 뭐 별거 없네' 하고서도 이상하게 찬바람 불기 시작하면 자꾸 방콕이, 태국이 그리워지는데에는 이 쌩쏨이 한 몫 한다.
하지만 자고로 술이 달면 안 된다는 주당의 법칙을 신봉하는 나는 레드불과 콜라를 넣는 것보다는 깔끔하게 라임과 탄산수만 넣는 편을 선호한다. 음식과 함께 할 때도 훨씬 잘 어울리는 데다 무엇보다 풍부한 비타민이 숙취예방에 도움이 된다. 그래서 거의 매일 밤 1일1쌩쏨을 실천했던 치앙마이 여행에선 하루도 속이 거북하거나 머리가 무거웠던 적이 없었다. (안주를 든든히 먹은 탓이겠지만...?)
태국 북부 여행을 함께 한 H와 나는 매일 저녁마다 라임 찾아 삼만리였다. 음식점에서도 주문하면 라임을 주긴 하지만 간장종지만 한 그릇에 조금씩 썰어주는 것으로는 성에 안 찼기에 지나가다 야채나 과일 비스무리한 것을 팔 것처럼 보이는 가게면 무조건 들어가서 "마나우 있나요?"를 외쳤다.
치앙라이에서는 음식과 주류를 따로 주문하는 시스템의 야시장을 갔다. 주류 코너에서 라임을 따로 달라고 했더니 "우리는 안 파는데요?" 하더니 옆 가게 음식점 사장님한테 서너 개를 빌리는 것이었다. 얼마를 받아야 하는지도 감이 안 잡히는지 한참을 뜸을 들이다가 10밧을 달라 해서 주고 온 기억이 난다. 적은 양이 마음에 안 드는 친구는 그 길로 마나우를 찾으러 나갔다. 한참 뒤에 마나우를 봉다리 가득 들고 온 친구에게 물었더니 팟타이 노점에서 30밧에 샀단다. 우리는 다음날에도 그 노점에서 라임을 실컷 사서 방에서 쌩쏨파티를 했다.
나는 술과 음식의 조화를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인데, 특히 강해서 먹기 고약한 음식을 중화시키는 데 탁월한 효과를 발휘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고등학교 때까진 싫어했던 곱창을 소주를 접하면서는 환장하듯 좋아하게 됐고, 아직까지도 어려운 홍어지만 막걸리가 있다면 두세 점까지는 먹을 수 있는 것처럼.
거칠고 투박한 란나 푸드(태국 북부 음식)와 쌩쏨도 그랬다. 코코넛크림을 1도 안 섞은 커리와 태국 북부식 소시지인 '싸이 우아'는 사실 첫 입에 당황스러웠다. 웬만한 향신채는 이제 적응이 됐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돌직구 같은 맛이 나다니... '잔뜩 시켜놓고 어쩌나' 하던 요리인데 쌩쏨을 반주삼아 먹으니 그럴듯했다. 술의 쌉싸름함이 향신료를 어느 정도 눌러줘서 다음에도 한 번 시도해보고픈 마음이 들었다.
쌩쏨은 해산물 요리와도 썩 잘 어울린다. 방콕에 시푸드 잘하는 집에 한 두 군데겠냐만은 갈때마다 홀린듯 들리는 손통포차나에서 태국식 게장인 '뿌덩'과 마시는 쌩쏨을 가장 좋아한다. 동행인들은 더운 나라인데 익히지도 않은 해물을 어찌 먹냐며 핀잔을 주곤 했]지만, "쌩쏨이 다 소독해 줄거야" 하면서 겁 없이 자주도 먹었다. (다행히 대여섯번 갔지만 한 번도 탈이 난 적은 없다.)
음식에 당연히 그 지역의 토양과 햇빛이 스며들듯 술에도 마찬가지다. 쌩쏨에선 기분 좋은 남국의 정열과 후끈한 공기가 느껴진다. 태국에 다녀올 때마다 쌩쏨을 한 병씩 사와 아껴먹곤 했는데, 최근엔 서울에도 쌩쏨을 취급하는 태국음식점이 많아져 반갑다. 짭쪼름하게 튀긴 닭날개와 파파야 찹찹 다져넣고 피시소스, 라임, 땡초 다져넣어 버무린 쏨땀을 쌩쏨과 먹으면서 다시 태국에 갈 날을 그리곤 한다. 한파에 어깨가 움츠러드는 겨울이면 더더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