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마기차에서 내리니 별세계가 펼쳐졌다. 수 십 군데의 와이너리가 모여 무료 시음을 권하고, 말도 안 되게 저렴한 가격으로 와인을 팔고 있었다. 아니 이렇게 공짜로, 저렴하게 주셔도 되나 죄송한 마음이 들 정도니 술쟁이에겐 완벽한 여행지다. 술을 따라 주시던 할아버지의 얼굴은 생각이 잘 안 나는데, 술을 담고 아마도 술의 재료가 되는 포도 농사까지 지었을 그 손에 굵은 주름이 있었다는 건 어렴풋이 기억난다. 헝가리 에게르(Eger)의 '미녀의 계곡' 이야기다.
유명한 관광지보다 기대 안 했던, 우연히 방문했던 여행지가 훨씬 큰 감동을 줄 때가 있다. TV 프로그램이나 유튜브 콘텐츠로 접하지 않아 뇌리 속에 영상정보 자체가 없는 곳이라면 더욱 그렇다. 사진 몇 장과 제한된 활자 정보로 상상력을 키우다 현지에 도착했을 때의 짜릿함이란. 내게는 헝가리의 소도시 에게르가 그랬다.
에게르 현지인들이 이용하는 시장. 너무 관광지스러운 여행지 말고 이런 사람 냄새나는 여행지가 좋다.
헝가리엔 3박 4일을 머물 예정이었다. 부다페스트에만 시간을 할애하기엔 아쉬우니 멀지 않은 소도시 한 개를 둘러보자 하고 검색을 해보다 불현듯 떠올랐다. 의외로 헝가리가 유명 와인 산지라는 것. 헝가리를 대표하는 토카이(Tokaj) 와인의 산지 토카이가 불과 2시간이면 기차로 닿았다.
토카이는 프랑스 소떼른(Sauternes), 독일 트로켄베렌아우르레제(Trockenbeerenausles)와 더불어 세계 3대 귀부(貴腐) 와인으로 불린다. 프랑스 루이 14세가 토카이를 '와인의 왕, '왕의 와인'이라 칭하면서 유명해졌단다.
귀할 귀 자에 썩을 부, 귀하게 썩은 와인? 포도가 보트리티스 시네레아(Botrytis Cinerea)라는 곰팡이에 오염되면 수분이 빠지면서 상대적으로 당도는 높아진다. 이 포도로 양조하면 스위트 와인이 만들어지는데, 오래될수록 벌꿀과 견과류 등의 향이 진해지면서 깊은 풍미를 낸다. 푸아그라와 함께 먹으면 꿀조합이라는 게 일종의 마리아쥬 공식이다. 귀한 곰팡이병에 걸린 이 와인은 가격도 꽤 비싸다.
그래, 귀하고 비싼 거 알겠다. 근데 문제는 내가 달달한 술을 즐기지 않는다는 거다. 낮술 퍼먹기 좋은 여행지를 가고는 싶고, 단 술은 안 당기고 고민하다 검색해보니 레드 와인으로 유명한 '에게르'라는 도시가 있었다.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와인의 별칭이 무려 '황소의 피(Egri Bikavér, 에그리 비커베르)란다. 무섭게 시뻘건 액체가 연상돼 식겁하기는 했지만, 달다구리 화이트보다는 저돌적인 레드가 내 취향이니 콜!
무시무시한 별칭은 1552년 오스만튀르크가 헝가리를 침략했을 때 만들어졌다. 수 만의 튀르크 군이 고작 수 천명의 병사를 가진 에게르 성을 쳤다. 곧 성이 함략될 것이 자명해 보였다. 이때 에게르의 병사를 구원한 게 바로 와인이란다. 성주인 도보 이슈트반이 창고를 열어 군인들에게 술과 음식을 내줬고, 에게르 군은 술기운을 빌어 두려움을 진정시키고 승리를 거뒀다. 붉은 와인에 물들은 에게르 군의 용맹한 모습을 보자 튀르크 군에는 에게르 병사들이 황소의 피를 마시고 전장에 나왔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백병전에선 사기를 잃으면 곧 패하는 것. 튀르크 군이 물러났고, 이후 에게르의 와인은 황소의 피라는 별명을 얻었다.
오스만튀르크와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에게르 성.
부다페스트 켈레티(Keleti) 역에서 기차를 타고 약 2시간을 달리면 에게르에 갈 수 있다. 시내를 빠져나오자마자 한적한 농촌의 풍경이 펼쳐졌다. 화려한 야경을 뽐내는 부다페스트와는 무척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드넓은 들판, 옥수수 밭, 흐드러지게 핀 해바라기 밭을 구경하다 잠깐 졸았더니 벌써 도착이다.
에게르 시내는 아기자기하고 깨끗했다. 현지인들이 이용하는 시장에서 장바구니 구경을 하다 2000원도 안 되는 돈에 산딸기를 실컷 먹고선 에게르 성에 올랐다. 도보 이슈트반이 튀르크 군을 무찌른 바로 그곳이다. 성곽을 오르니 주황색 지붕을 얹은 집들이 들어선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화려함이나 정교함을 무기로 하는 관광지와는 또 다르게, 장엄함과 우직함이 주는 감동이 있는 곳이었다.
여행의 주 목적지인 미녀의 계곡은 에게르 시내에서 꼬마기차를 타고 5분쯤 가면 나온다. 발그레한 볼을 하고는 취기에 목소리톤이 적당히 높아진 이들이 미녀의 계곡을 즐기고 있었다. 겉으로는 특별할 것 없는 구멍가게나 레스토랑처럼 보이는데, 안에 들어가 보면 상당히 깊은 동굴이 나온다.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와인 저장고다. 주인장이 와인의 종류를 간단히 설명하고 시음을 권한다. 시음주는 소액을 받는 곳도, 공짜로 주는 곳도 있는데 시음주라기엔 황송하게도 한 잔 가득 부어주니 빈 속에 가면 금방 알딸딸해진다.
미녀의계곡에는 수십 군데의 와이너리(와인셀러)가 한 장소에 모여있기 때문에 다른 여느 와이너리 투어보다 와인맛을 보기가 한결 수월하다. 술을 마시고 운전을 할 수는 없으니 보통은 기사를 포함한 차량을 빌리거나 여행사의 투어상품을 이용해야 할 텐데, 두 다리만 튼튼하면 여러 곳을 다닐 수 있는 것이다.
에게르 시내에서 꼬마기차를 타면 미녀의계곡으로 갈 수 있다. 간단한 식사를 할 수 있도록 레스토랑을 함께 운영하는 와인셀러도 있다.
에게르에서 와인을 마시며 또 한 가지 신선했던 점은 와인을 커다란 페트병에 받아 살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현지인으로 보이는 이들은 집에서 가져온 듯한 용기에다가 와인을 받아가기도 했다. 어르신들의 '라떼는 말이야' 단골 소재가 생각나는 지점이다. 어릴 때 양조장에서 막걸리를 받아오라는 심부름에 양철 주전자를 들고 가서 받아오곤 했다는...에게르에선 대부분의 와인을 1리터에 600포린트(1포린트=약 3.77원) 정도에 팔았는데, 알코올 도수를 생각하면 막걸리보다 싼 값이다.
"약수통으로 한 통 줘요. 내일 우리 집에 친척들이 많이 오거든. 파티를 할 거예요." "우리 딸 다음 달에 결혼하잖아. 피로연 때 손님들 대접할 술은 뭘로 할까?" 이곳 주민들은 사무치게 부럽게도 단골 와인집에 가서 이런 대화들을 할 것이다. 마치 명절에 단골 고깃간에서 갈비찜 거리를 끊으며 스몰토크를 하듯 말이다.
안타깝게도 난 하루 잠시 들르는 객이고, 몇 곳 들러 시음주를 마셨더니 부다페스트 숙소를 제정신에 찾아가려면 들통에 와인을 가득 담아오는 사치는 부릴 수가 없었다. 레이블에 수소의 머리가 그려진 에그리 비커베르 한 병을 가져올 수밖에. 이 와인은 집에 고이 잘 모시고 와 고기를 굽던 어느 날 열어서 꼴깍꼴깍 맛있게 잘 마셨다.
헝가리에서 와인과 함께 즐긴 식사들.
에게르는 여러모로 내가 선호하는 여행지의 모습을 갖췄다. 관광객이 너무 많아 주객전도되지 않은 곳, 충분히 낯설어서 내 일상과는 완전히 분리됐다고 느껴지는 곳, 소도시 특유의 순박함이 낯선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곳이었다. 다음에 동유럽 여행을 갈 때는 부다페스트는 건너뛰고라도 에게르에서 꼭 1박 이상을 할 셈이다. 하루 묵을 집을 잡아놓고 큰 통에다 와인을 받아다 좋은 이들과 흥겹게 마시고 떠들며 그 밤을 불태울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