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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쏨땀쏨땀 애슐리 Jul 17. 2021

스테이크, 와인, 토스카나

누가 "평생 소고기만 먹을래, 돼지고기만 먹을래?" 물어보면 난 돼지고기라고 답하는 편이었다. 돼지고기는 2인분도 거뜬한데, 소고기는 1인분만 먹으면 물려서 금세 감흥이 떨어지곤 했다. 진짜 비싸고 고급인 소고기를 먹으면 당연히 맛있지만 그런 걸 늘 먹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적당히 타협해서 맛있는 삼겹살을 자주 먹는 게 낫지 하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대답은 바뀌었다. '인생 고기', 피오렌티나 스테이크(Bistecca alla Fiorentina)를 맛보고 나서다. 피렌체 여행에서 나는 특별한 날에만 먹을 수 있을지언정 소고기는 포기가 가능한 존재가 아니란 걸 새삼 깨달았다. '호의는 돼지고기까지, 이유 없는 소고기는 없다'는 말도 함께.


피오렌티나 스테이크는 피렌체식 T본 스테이크를 말한다. T자형 뼈에 붙어있는 안심과 등심을 한 번에 다 맛볼 수 있는 메뉴다. 피오렌티나 스테이크는 이탈리아 토착 품종인 키아니나(Chianina)를 사용하는 것이 원칙이라고 한다. 털이 희고 엄청난 크기를 자랑하는 이 소는 기름기는 덜하면서도 풍미는 강한 것이 특징이다.

 마블링에 의존하지 않는 소고기도 충분히 맛있다는 점을 알려준 키아니나 품종.

피렌체에서 유명한 레스토랑들은 보통 피오렌티나 스테이크를 1kg 단위로 팔곤 했다. 아무리 뼈 무게를 감안한다 해도 두 사람이 그렇게 많은 소고기를 먹는 게 가능할까 의문이었다. 그래, 어찌 배에 넣는 건 가능하겠지만 느끼하고 질릴 텐데 굳이 그렇게 많이 먹어야 할까 고민도 됐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런 고민은 완벽한 기우였다.


우선 기름기가 적어서 많이 먹고 싶어도 덜 먹히는(?) 한우와는 결이 달랐다. 키아니나 품종은 한국에서 소고기의 등급을 논할 때 흔히 들이대는 잣대인 '마블링'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렇다고 퍽퍽한 질감은 아니다. 저온으로 오래 숙성했기에 육질이 연하면서도 감칠맛이 풍부했다.


그리고 또 하나. 그곳이 와인의 천국인 토스카나였다는 점이 이 글의 핵심이다. 토스카나는 이탈리아 중부 지역의 대표 와인 생산지인데, 이 지역에서 가장 특징적인 포도가 '산지오베제(Sangiovese)'다. '주피터(제우스) 피'라는 어원을 갖고 있다. 와인 병에 '키안티(Chianti)',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Brunello di Montalcino, BDM)', '비노 노빌레 디 몬테풀치아노(Vino Nobile di Montepulciano)'가 써 있다면 산지오베제로 만들었겠구나 생각하면 된다.

와인 천국 이탈리아. 술쟁이는 행복했다.

산지오베제로 양조하면 대체로 적당한 타닌을 가진, 체리나 딸기 등 붉은 과일향이 느껴지는 루비색의 와인이 만들어진다. 가장 큰 특징은 아무래도 산도가 높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새콤한 토마토소스 파스타를 먹을 때 곁들여도 와인이 죽지 않고 시너지 효과를 낸다. 피렌체에서 스테이크를 먹을 때면 보통 키안티나 BDM을 마시곤 했다. 고기를 씹다가 산도 높은 와인 한 모금을 입에 흘려 넣으면 기분 좋은 산미감에 입 안이 정돈되는 느낌이 들면서 마지막 한 입까지도 물리거나 느끼하다는 느낌을 전혀 받지 못했다.


토스카나를 여행하기 전까지 난 와인의 산도를 그리 즐기지 않았다. 풀바디, 강한 타닌, 오크통 숙성 과정에서 오는 실키한 질감과 바닐라 향 등이 돋보이는 신대륙 와인이 내 취향이라고 생각했던 것. 그래서 소고기를 구울 때  호주 쉬라즈나 미국 까베르네 소비뇽을 주로 곁들이곤 했는데, 이제와 생각하니 첫 입엔 맛있었지만 많이 못 먹겠다 느낀 이유가 '강대강(强對强)'의 조합이어서가 아닐까 싶다. 이 여행을 계기로 내 와인 취향은 확실히 구대륙으로 굳어졌다. 이 여행은 와인을 제대로 배워야겠다는 계기가 돼 지난해 국제와인인증과정인 WSET Level2를 취득했다. (코로나19가 잠잠해져야 Level3에 도전할 텐데 말이다.)


와이너리 투어에서 방문했던 와인저장고

이탈리아를 여행하신다면 꼭 토스카나 와이너리 투어를 해 보시길 바란다. 이탈리아에서 와인으로 유명한 지역이 토스카나뿐이겠냐만, 이태리 와인의 제왕은 바롤로(Barolo, 피에몬테 Piemonte 지역에서 네비올로 Nebbiolo 품종으로 생산하는 레드와인)가 아니냐 하시는 분도 있겠지만 토스카나 와이너리를 거쳐야 할 상당히 실용적인 이유가 있다. 로마에서 피렌체로, 피렌체에서 로마로 가는 길에 위치해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어차피 시간을 내 이동해야 한다면 토스카나의 너른 평원을 경험하는 게 여러 모로 이득이다. 와인 생산지로 유명한 소도시들은 아기자기하고 동화 같은 풍경을 자랑해 인생 샷을 건지기에도 그만이다. 교통편을 짜기가 부담스러운 이들을 위해 현지 여행사에서 다양한 코스를 구성해 놨다. 로마에서 출발해서 투어를 한 뒤 피렌체에 도착하는, 혹은 그 반대의 코스도 있다. 해외에서의 운전이 자신 있다면 차를 빌려 토스카나를 여행하고 농가민박(Agriturismo)에 묵는 것도 현지의 정취를 흠뻑 느낄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와이너리 투어를 방문하면 소도시와 토스카나 평원을 편리하게 둘러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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