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마시러 떠난 여행기
몇 년간을 여행 집착증 환자로 살았던 것 같다. 겨울이 오기 전 1년 여행의 메인이벤트인 다음 해 여름 휴가지 항공권을 끊고 겨울엔 따뜻한 동남아 여행을 일주일 다녀왔다. 봄, 가을에는 이틀, 사흘 정도만 휴가를 내고도 다녀올 수 있는 근거리 여행지를 악착같이 찾았다.
다음 여행지를 하이에나처럼 찾아 헤맸던 건 일종의 현실도피가 아니었나 싶다. 여행을 워낙 좋아하기도 하지만 다음에 갈 여행지가 정해지지 않으면 불안증이 도졌고, 앞으로의 여행을 손꼽으며 몇 달을 버티고, 약발이 떨어지면 또 다음 여행에 대한 기대로 몇 달을 버티고 그렇게 몇 년을 보냈다.
다가올 여행에는 그리 집착했으면서 다녀온 뒤엔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않고 앞만 보며 달렸다. 남들 다 한다는 SNS도 하지 않았고, 알량한 기억만 믿고 복기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추억은 희미해져 갔고 어떤 기억은 꿈인지 생시인지, 내가 실제로 경험한 게 맞는지 아니면 TV 여행 프로그램에서 본 걸 내 경험으로 착각한 건지 헷갈리는 경우가 생기기도 했다.
그러다 코로나19로 발이 묶였다. 당분간 몇 년은 다음 여행을 계획할 일이 없어졌다. 그래서 미래의 여행이 아닌 과거의 여행을 반추하기로 했다. 벼르고 별로 떠난 여행지건, 갑자기 휴가가 생겨 3일 전 항공권을 끊은 여행지건 시간이 지나고 나니 가장 또렷하게 기억에 남는 건 길 위에서 마셨던 술맛이다. 여행지에서 마시던 낮술만큼 달콤한 게 또 있었을까.
십몇 년이 지나 사진도 잃어버린 여행일지라도 길 위에서 마신 술맛은 잊히지가 않았으니 쓰기 시작하긴 했다. 그런데 애초 나는 술 마시러 여행을 가니 어찌 보면 술이란 주제로 엮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거긴 어떤 술이 유명한가', '술값은 싼가'가 내가 여행지를 선택하는 가장 큰 요소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