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를 건넌 것은 순전히 맥주를 마시기 위해서였다. 하루만 연차 내고 갈 만한 해외 여행지를 찾고 있었고, 그러자면 비행시간이 짧아야 했다. 어차피 짧은 휴가인데 관광과 휴양, 쇼핑 등 이것저것 욕심내 봤자 이도 저도 안 될 것이었다. 그래서 하나에만 집중했다. 술이나 마시자!
비행기로 1시간 10분밖에 안 되는 거리니, 인천공항에서 칭다오 공항보다 집에서 인천공항까지 시간이 더 걸린다. 가까운 거리인 듯싶지만 물 건너오면 선도가 떨어지는 것인지, 역시 맥주는 현지에서 마셔야 제 맛이다. 뜨거운 태양 아래 차가운 맥주를 마시고 싶다고 맥주 축제가 열리는 여름에 칭다오를 가는 사람은 바보다. 중국 사람들은 찬 음료를 마시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맥주도 예외는 아니라, 여름에 가면 미지근한 맥주를 마실 가능성이 매우 높다. 중국에서 맥주를 시킬 땐 무조건 외치자. "삥더(氷的, 차가운 것)!"
몇 해 전 배우 정상훈 씨가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양꼬치&칭다오'라는 유행어를 밀면서 한국 사람들은 둘을 세트처럼 여기기 시작했다. 이 유행어에서 영감을 얻어 명명된 양꼬치 가게만도 전국에 십 수 군데가 된다. 한국에 수입되는 중국 맥주 중 가장 유명한 게 칭다오 맥주다 보니, 직관적 웃음을 주기 위해 짝지어진 것일 테다. 그러나 적어도 칭다오에선 이 말이 통하지 않는다.
현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츠 깔라 허 피지우(吃蛤蜊喝啤酒)". 바지락을 먹고 맥주를 마신다는 뜻이다. 맥주박물관에 가 달라는 나의 말에 택시기사가 해 준 말이다. 칭다오 맥주박물관에서 팔던 마그네틱엔 "츠 하이시엔(海鲜, 해산물) 허 피지우"라고 쓰여 있었다. 어찌 보면 당연하다. 중국 동부 연안에 위치한 칭다오는 해물이 풍부하고, 가격도 싸다. 서부 내륙 초원에서 뛰놀던 양을 들여오는 것보다, 앞바다에 나가 캔 조개가 더 신선할 것이다.
신선하고 씨알이 굵은 해산물. 석화 한 개가 성인 여자 손바닥 만한 크기다.
칭다오에서 나는 깨달았다. 맥주만 마셔도 취하는구나! 무슨 '지구는 돈다' 같은 당연한 말을 하냐고 반문하는 이들이 있겠지만, 독주를 선호하는 나는 맥주만 마시면 취하기 전에 배가 불러버려 술맛이 떨어진다(그렇다고 안 마신다는 말은 아니다). 육류나 탄수화물 안주를 먹으면 술이 들어갈 자리가 줄어들 텐데, 배는 덜 부르면서 감칠맛이 기가 막힌 바지락을 까먹다 보니 맥주가 끝도 없이 들어간다.
칭다오 특색 바지락 요리는 '라 챠오 깔라(辣炒蛤蜊)'다. '맵게 볶은 바지락'이란 뜻이다. 웍에 기름을 넉넉히 두르고 건고추와 바지락을 센 불에 휘리릭 볶아내면 금방 완성된다. 이탈리아 요리, 봉골레 파스타에서 면만 뺐다고 생각하면 비슷한 맛이다. 조개에 적당한 염분이 있기 때문에 별다른 양념이 필요 없다. 칭다오에서 먹어본 대부분의 요리들은 중국 여타 지역에 비해 향신채의 사용이 적고 양념이 강하지 않아 해물 원재료의 맛을 살리는 데 중점을 둔다는 느낌을 받았다.
칭다오 맥주와 찰떡궁합이었던 바지락 볶음, 굴 구이, 가리비당면.
바지락 예찬만 하면 칭다오 맥주가 서운할 것 같다. 주인공은 맥주인데 말이다. 사실 편의점에서도 4캔에 만원이면 구할 수 있는 칭다오 맥주가 뭐 그리 대단하겠나 싶었지만, 주(酒)님의 품 안에선 한 없이 겸손해야 한다는 점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위엔장(原裝) 맥주를 영접하는 순간 말이다. 위엔장 맥주는 생산한 지 24시간, 칭다오 내에서만 유통되는 맥주 원액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흔히 접하는 칭다오 맥주가 투명한 황금빛을 띠는 라거 계열이라면, 위엔장은 불투명하고 옅은 노랑빛이다. 마셔보면 라거와 바이젠의 중간 정도 맛을 보여준다. 카스나 테라·하이네켄·버드와이저 등이 대표적인 라거 맥주고, 바이젠 중에서는 호가든과 파울라너 등이 유명하다.
칭다오에서 마신 다양한 맥주. 위엔장 생맥주(왼쪽 상단)는 보통의 라거와 비교해 더 노랗고 불투명해 마치 바이젠 같은 느낌이다.
맥주박물관 근처 맥주 거리나 윈샤오루 미식가에서도 위엔장 맥주를 마실 수 있지만, 그래도 생산공장까지 갖추고 있는 박물관 펍의 퀄리티를 따라갈 수는 없다. 관광객들만 가득할 것이라 생각했던 이곳에선 의외로 현지인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위엔장 맥주를 테이크아웃해 집에 가서 마시려는 사람들이다. 나도 저녁 먹던 맥주 거리의 음식점에서 2차용 음식을 포장하고, 박물관 펍에서 산 테이크 아웃 위엔장 맥주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그곳의 맥주 맛도 나쁘진 않았지만 박물관 펍에서 마셨던 충격적인 그 맛은 아녔다. 이미 배부른 상태에서는 감흥이 떨어지겠지 했는데, 역시는 역시였다.
박물관 펍에서 테이크한 생맥주.
칭다오에선 길거리에서도 생맥주를 비닐봉지에 담아 파는 광경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걸으면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듯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 이 정도는 돼야 맥주의 도시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애초부터 음주와 미식에 중점을 둔 여행이기는 했지만, 칭다오엔 맥주박물관을 빼면 별다른 관광거리는 없었다. 비자를 발급받아야 한다는 데서 심리적 장벽이 있긴 하지만, 그냥 '오이도에 가서 조개구이에 술 한 잔 하자'는 마음으로 가볍게 떠난다면 만족도가 극대화되는 여행지다. 위엔장 맥주를 경험해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칭다오에 갈 가치가 있다고 본다. 평소 중국을 돈 주고 갈 생각은 안 해봤다던 여행 메이트도 그렇게 말했다.
칭다오의 거의 유일(?)한 관광지, 맥주박물관. 이 곳의 위엔장 맥주만 마셔도 칭다오에 갈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