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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쏨땀쏨땀 애슐리 Oct 27. 2019

무신론자의 사원탐방기

족자카르타=인도네시아 경주

"족자카르타가 어디냐 하면...음... 인도네시아의 경주 같은 곳이라고 해 두자."


이름도 생소한 곳을 여행하고 왔다고 하니, 도대체 뭐가 있어서 거길 갔느냐는 투의 물음이 쏟아졌다. 처음엔 구구절절 설명하다가 나중에는 방법을 바꿨다. '족자카르타=인도네시아의 경주'라고. 상대방이 아는 것에 투영해 설명하는 것만큼 빠른 이해가 없으니까. 특히나 풍문으로라도 들어보지 못한 낯선 무언가를 설명할 때는 이 방법이 더 효과적이다. 러시아 수프 보르쉬를 '마요네즈 탄 김치찌개'라고 표현하거나, 카자흐스탄의 수도 아스타나가 어땠냐는 질문에는 '세종시 비슷했어'라고 한다든가 말이다.

보로두부르에 조각된 다양한 부조

족자카르타는 인도네시아 정치, 경제의 중심지인 자바섬 중부의 고도(古都)다. 수도인 자카르타 역시 이 자바섬에 있고, 물리적 거리를 따지자면 자카르타와 발리의 중간쯤이라고 할 수 있다. Yogyakarta라고 표기해 욕야카르타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현지인들은 Y를 'ㅈ'으로 발음하는지, '족자카르타' 혹은 줄여서 '족자'라고들 불렀다. 인도네시아는 대통령을 국가 원수로 하는 공화정이란 게 일반적인 상식이다. 그러나 족자는 술탄(왕)이 통치하는 특별 행정 자치주다. 행정직제상으로는 술탄이 곧 주지사인데, 세습을 보장받는다고 한다.


난 무신론자이지만 사원을 둘러보는 여행이 좋다. 신이 있고 없고를 떠나 신을 믿는 사람들은 이 땅에 찬란한 문화유산을 남겼기에. 족자는 '인도네시아의 천년고도'라는 별명을 가진 만큼 역사와 문화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다양한 건축물들을 쉽게 접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여행객에게 가장 유명한 곳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 '보로부두르(Borobudur)'와 '쁘람바난(Pram banan)' 사원이다. 전자는 불교사원, 후자는 힌두교 사원이다. 인도네시아 인구의 80% 이상이 이슬람 교인이고 특히나 족자는 무슬림의 영향력이 강한 지역인데 의외로 족자를 대표하는 유적지들이 불교, 힌두교 사원이라는 점이 아이러니다.

10층의 구조물인 보로부두르이 맨 꼭대기 층에는 부처님을 모신 스투파가 여럿 모여있다. 뚫린 구멍으로 안을 들여다보면 '헉' 할 수도...머리 없는 부처님 형상이 있다.

여행객들은 일출 때 보로부두르를, 일몰 때 쁘람바난을 방문하는 투어를 예약하는 게 일반적이다. 나 역시 그런 방법을 따랐지만, 이번 여행은 일주일 내내 족자에 머물러 비교적 시간이 넉넉했기에 굳이 거리가 먼 두 곳을 묶어 방문할 필요는 없었다는 후회도 남았다.


보통 보로부두르 사원을 족자 여행의 하이라이트로 꼽는다. 족자에 도착한 첫날, 배부터 채우자 해서 들어간 로컬 식당에서 사장님이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건넨 한 마디가 "보로부두르는 갔다 온 거니? 반드시 가야 해"였다. 니예 니예, 그거 보러 왔습니다만...


이 곳은 세계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불교 사적이다. 거대한 석조 사원으로, 꼭대기에 종 모양 스투파를 얹은 모습이 인상적이다. 근처 므라삐 화산의 폭발로 천 년이 넘게 묻혀있다가 1800년대 초반 발견됐다. 역사와 종교에 대한 지식이 없더라도 마주하면 그 위용을 실감할 수 있을 만큼 대단한 유적지 이건만 안타깝게도 자세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고, 보존 상태도 아쉬운 부분이 있다.


8~9세기에 지어진 사원인데, 화산재에 묻힌 것도 그렇지만 13세기 인도네시아에 이슬람교가 전해지면서 그전에 뿌리내렸던 종교는 쇠퇴하기 시작했으니, 잊혀졌거나 버려졌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스투파 안을 들여다보면 부처님의 형상이 보인다. 머리 잘린 부처님이...도굴꾼들이 부처님 머리만 따로 잘라 팔아버렸다는 설도 있고, 식민지배를 하고 있던 네덜란드가 태국의 환심을 사기 위해 불상의 머리를 잘라 태국 국왕에게 선물했다는 얘기도 있다. 둘 중 뭐가 됐든 어마어마한 유적지가 발견됐는데, 당시 국가가 강건했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기에 우리 역사와도 언뜻 오버랩되는 면이 있다.

쁘람바난은 오후에 방문해서 그런지 사진이 별로 없다. 땡볕에 사원 구경을 하려니 정신이 혼미해서...

쁘람바난의 첫인상은 그랬다. 캄보디아 앙코르왓에서 'ctrl+Z' 단축키를 눌러 정글을 제거한 듯한 느낌. 앙코르왓이 정글 속에 묻혔다가 발견된 사원이라면, 쁘람바난은 보로부두르와 마찬가지로 화산재를 뒤집어쓰고 있다가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시바, 비슈누, 브라마 사원을 중심으로 여러 개의 사원들이 둘러싸고 있는 형태다. 하나의 사원이라기보다는 사원군이라는 표현이 정확하다.


쁘람바난은 일몰 풍경도 유명하지만, 조명이 켜진 밤에도 사람들이 몰려든다. '라마야나 발레 (Ramayana Ballet )'를 보기 위해서다. 고대 인도의 대서사시 라마야나의 줄거리를 바탕으로 꾸민 무용극으로, 발리의 '께짝 댄스(Kecak Dance)'와도 비슷하다.

탑이 무너진 잔해가 남아 있는 세우 사원. 잔해 옆을 걸으며 과거로 타임슬립하는 느낌이 들었다.

보로부두르와 쁘람바난이 족자 문화유산의 양대산맥이긴 하지만, 이외에도 족자에는 크고 작은 사원들이 널려 있다. 지도를 보면 'Candi XX'라고 쓰여 있는 곳이 셀 수 없이 많은데, Candi는 사원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양대산맥이 족자 여행의 메인, 끝판왕 느낌이긴 하지만, 사실 나는 이름도 모르고 방문했던 작은 짠디들에 더 심쿵했다.


족자는 그동안 가봤던 다른 어떤 여행지보다 조용한 편이어서 보로부두르와 쁘람바난도 둘러보기 어려울 정도로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그래도 이 지역 대표 관광지인 만큼 구경꾼 모드로 접근하는 사람들 속에 나도 1인의 구경꾼으로 방문했다고 볼 수 있다. 지역 최대 문화유산인 만큼 현지 물가와 비교해 보면 입장료도 엄청나다. 특히 외국인에겐 내국인보다 입장료를 크게 비싸게 받고 있는데, 두 곳 모두 한화 3만5000원 가량이 필요하다.

그런데 크게 알려지지 않은 사원들은 고즈넉한 맛이 있었다. 어떤 때는 아무도 없는 짠띠를 오롯이 느끼기도 했다. 입장료도 1000원 정도로 저렴해서 부담이 없었다.

쁘람바난과 더불어 일몰 맛집으로 알려진 이조 사원.

세우 사원(Candi Sewu)은 쁘람바난에서 1km도 떨어지지 않았는데, 마치 건너편과는 별개의 세상인 것처럼 차분했다. 지진으로 무너진 흔적이 남아있는 이 곳은 오히려 그 돌무더미 때문에 가슴이 짠한 매력이 있다. 이조 사원(Candi Ijo)은 외국인 관광객이 아닌 현지 커플들이 석양을 기다리며 꽁냥꽁냥 대고 있었다. 바롱 사원(Candi Barong)은 호텔에서 자전거를 빌려 들른 곳이다. 익숙하지 않은(내 키에 비해 너무 커서 무서운) 자전거가 신경 쓰이긴 했지만, 아직도 바롱 사원을 생각하면 자전거 페달을 굴리며 마주했던 상쾌한 아침 공기가 떠오른다.


나 역시 족자를 떠올릴 때 수많은 사원들이 가장 먼저 떠오르긴 했지만 천년고도라 해서 구식이고 불편한 곳은 전혀 아니다. 도착하기 전엔 경주보다 작은 시골이겠거니 했는데, 막상 도시 규모도 커서 "경주 아니고 대구 정도는 되겠는데?" 하기도 했다. 족자 여행을 하기 전엔 태국 치앙마이와 발리 우붓을 머물고 싶은 여행지 1위로 꼽곤 했다. 족자는 이 두 곳과 참 닮았다. 다만 더 정확하게 표현하려면 이 수식어를 붙여야 한다. '관광객이 지금처럼 많아지기 전'이라는 것.

자전거 타고 찾아간 바롱 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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