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술쟁이로소이다. 자타공인 이 구역 술쟁이가 바로 나다. 그런데 족자카르타 여행에선 주님을 모시기 힘들었다. 예상보다 훨씬 더.
우연히 웹서핑을 하다 발견한 사진 한 장이 나를 족자카르타로 이끌었다. 까마득한 산 정상에 거대한 손 하나가 공중 부양한 채 떠 있었고, 산 아래엔 계단식 논밭이 굽이굽이 펼쳐졌다. 나뭇가지로 엮은 그 손 위에 올라 사진을 찍고픈 욕망에 그 해 여름휴가를 족자카르타로 떠났다. 족자카르타엔 빼어난 자연 풍경이 펼쳐진 곳에 포토스팟을 만들어 놓은 경우가 많다. 그 손의 정체는 포토스팟 중에서도 가장 힙하다는 '피누스 펭게르(Pinus Pengger)'였다.
족자카르타는 인도네시아의 천년고도이기도 하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 '보로부두르(Borobudur)'와 '쁘람바난(Pram banan)' 사원이 유명하다. 이 두 곳이 족자 문화유산의 양대산맥이긴 하지만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은 크고 작은 사원들이 곳곳에 있어 여행객의 발길을 잡아끈다.
족자카르타에선 원없이 사진을 찍었다. 잘 꾸민 포토스팟과 유적지가 넘쳐나는 매력적인 여행지. 볼거리는 넘쳐나지만 무슬림 인구가 많은 지역이기 때문에 술을 파는 식당이나 바(bar)를 찾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 상당히 불편했다. 물론 관광객을 상대로 하는 음식점이나 호텔에선 대부분 술을 판다. 호텔이 줄지어 위치한 말리오보로나 프라위로타만 거리에선 빈땅 맥주 한 병을 시켜놓고는 세월을 낚는 강태공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방콕의 카오산로드나, 발리의 꾸따해변과 다르지 않게 말이다. 다만 현지 물가에 비해, 식당의 식사 메뉴와 견줘 술값이 '오우 비싸네' 싶을 뿐.
비싼 돈을 내고서라도 술을 마시고 싶다면 그건 자신의 선택이지만, 로컬 음식점은 알콜 메뉴가 아예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점은 꽤 아쉬웠다. 관광객만 가는 곳 말고, 현지인들이 가는 음식점을 찾아다니자는 게 나의 여행지론인데 산해진미를 앞에 두고 반주를 곁들일 수 없다니 아쉽고도 아쉬웠다.
족자카르타 여행은 그래서 원치 않게 건전했다. 9월 초의 족자는 해가 빨리 뜨고 빨리 졌다. 그래서 더워지기 전 동틀 무렵에 일어나 가벼운 조깅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일찍 일어날 수 있었던 건 빨리 잤기 때문이다. 술이 없는 밤은 딱히 할 일이 없다. 이른 저녁을 먹고 소화를 시키고는 밤 9시쯤엔 자리에 들었다. 저렴한 물가에 부담없이 맥주를 들이킬 수 있는 게 동남아 여행의 묘미라고 생각한다면, 족자카르타와는 맞지 않을수도 있다. 그래서 나 역시 족자카르타가 100% 맘에 들지는 않았다. 술 구하기 힘든건 지금 생각해도 누구에게 족자카르타 여행을 추천하기 힘든 가장 큰 이유다.
다만 뒤집어보면 이로 인한 장점도 분명히 있다. 술이 흔하지 않으니, 유흥과도 거리가 멀다. 여행자들의 거리라는 프라위로타만에서도 밤 10시면 파장 분위기라 눈살이 찌푸려지게 흥청망청하는 느낌은 없었다. 사람 사는 곳이 다 비슷하니 음성적으로야 무슨 일이 없을까만은, 필리핀이나 태국 등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낯뜨거운 상황은 연출되지 않았다. 물론 술 파는 곳이 적어서라기보다는(이것도 종교의 영향이긴 하다)성적으로 보수적인 이슬람 문화 때문일 것이다.
술이 너무 마시고 싶어 트립어드바이져에서 찾아간 Bar. 사진에서도 알 수 있듯 절간 같은 분위기. 독주를 찾아 일부러 찾아갔건만 이날은 맥주만 된다고 해서 눈물이 또록 흐를뻔. 20대 초반 필리핀 어학연수를 하며 한 가지 다짐한 게 있었다. 돈을 버는 어른이 되면 필리핀 여자 아이에게 후원을 하겠노라고. 1:1 후원의 폐해가 크다는 주위의 조언에 기관에 쓰임을 위임하는 방식의 기부를 하고 있지만 말이다. 필리핀에서 슈가 대디라는 존재를 처음 알았는데, 충격이 꽤 컸다. 거동도 불편해 보이는 서양인 남성이 미성년자로 보이는 현지인 소녀들과 짝을 이루고 있는 모습에 아연실색했다. 관광 이외엔 별다른 산업이 없는 가난한 나라의, 배움이 적은 여자 아이에겐 생존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을 것이다. 노천 바에서 관광객의 테이블을 얼쩡거리는 앳된 얼굴의 소녀들은 마닐라, 세부, 방콕, 파타야 등 어디에나 있다.
그런 광경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는 여행 후기를 한 유명 태국여행 커뮤니티에 올렸다가 기를 쓰고 화를 내는 회원들 몇몇을 보기도 했다. "그 곳은 원래 그런 곳이다", "섹스 관광이 태국 경제의 가장 큰 기둥이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 그런것도 제대로 모르고 태국여행 간 당신이 무식하다" 등등의 활자로 된 욕이 쏟아졌다. 원래는 언제부터를 원래라고 하는 것인지, 과거에도 그랬으면 지금도 미래에도 그러는 게 바람직한 것인지 물었지만 그들은 나를 훼방꾼 취급 할 뿐이었다.
족자카르타에선 무엇보다 필리핀이나 태국 등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슈가 대디들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어딘가에 환락가가 있지만 내가 가지 않았을 수도, 아니면 대놓고 매춘을 하기엔 정서상 맞지 않으니 음지로 숨어들어간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태국에서 싱하맥주 마시듯, 필리핀에서 산미구엘 맥주 마시듯 숨쉬듯 자연스러운 광경은 전혀 아니란 거다. 가족과, 특히 아이들과 여행갔을 때 민망할 일은 적어도 없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볼 때 힐링 여행지로 기억에 남는 이유가 아마 이런 이유 때문인 것 같다. 여성 여행자라면 특히 더 공감갈 것이다. 내 친구 S양은 십년도 더 전 패키지로 간 푸켓 여행에서 환락가를 접하고는 안 좋은 기억이 뇌리에 박혀 유럽이나 북미 같은 선진국만이 좋은 여행지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히게 됐다.
물놀이 후 마시는 맥주는 얼마나 꿀맛인가. 하지만 사진은 무알콜 맥주다. 호텔에서 술을 시키려거든 클럽룸으로 예약하는 편이 낫다. 그렇다고 족자카르타에서 술이 없어 입이 댓발 나왔던 게 합리화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유용한 팁이라면, 호텔을 예약할 때 라운지를 이용할 수 있는 클럽룸으로 예약하는 것이다. 그럼 너무 예산이 뛰지 않을까 싶지만 내가 묵었던, 족자의 몇 안되는 5성급 하얏트 리젠시에선 하루에 2~3만원만 더 내면 충분했다. 호텔 안에서 칵테일 한 잔을 시키는 값이 1만원 정도였으니, 둘이 술 한잔 씩에 안주만 곁들여도 뽕을 뽑는다.
나같은 경우엔 클럽룸을 예약하고 가라는 조언을 들었음에도 라운지에 목맬 것 같아서 그러지 않은게 크게 후회된다. 나같은 술쟁이에겐 일종의 여행자보험이 될 수 있었는데 말이다. 호텔 방 안에서 과자에 캔맥 한 잔도 사치였다. 편의점에선 무알콜 맥주만 팔고, 많지도 않은 리큐어샵은 시간을 빼서 찾아가야 한다.
그러니까 족자카르타 여행 가실 분들, 제발 클럽룸 예약하고 가세요! 아니면 면세점에서 술 싸들고 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