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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쏨땀쏨땀 애슐리 Oct 17. 2021

술병을 낫게 해주는 생선들

바닷가 술상은 해장국까지가 코스

바다 한 잔 마시고, 술 한 잔 마시고, 통통하게 살이 오른 제철 해산물 한 점 씹고. 바다 여행이 기대되는 것은 안줏거리가 지천에 널렸기 때문이다. 한편으론 숙취가 두렵지 않아서이기도 하다. 용왕님이 보내주신 생선들로 끓인 해장국 한 사발에 속이 풀어지니. 찬바람에 코끝이 찡한 겨울날 뜨끈한 국물 한 술을 떠 위장 속으로 흘려보내면 "크으, 이 해장국 먹으려고 내가 어젯밤 그렇게 달렸지" 소리가 절로 나온다.




뭉툭한 머리에 두툼한 입술, 몸집에 비해 작은 눈, 흐물흐물한 살성에 검은색 반점으로 뒤덮인 모습이 식욕이 당기는 모양새는 아니다. 이 독하게 못생긴 물건이 해장국 재료로 으뜸인 '꼼치'라는 생선이다. '곰치'라고 알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꼼치가 정확한 명칭이다. 곰치는 뱀장어목이고, 우리가 흔히 아는 곰치국의 주재료는 쏨뱅이목의 꼼치다. 국립수산과학원에 따르면 우리나라 연안에 서식하는 꼼치류는 꼼치, 물메기, 미거지 등 10여 종이다. 하지만 생선을 건져 올리는 어민들이나 식당 주인들도 정확하게 분류하지는 않고 그냥 '곰치'로 부르곤 한다.

모습을 보면 도저히 맛있을것같지가 않지만 몽글몽글한 식감이 일품인 곰치.

생선 살 자체에 별 맛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독특한 식감에 한 번 빠지면 헤어 나올 수 없다. 주로 국으로 끓여 많이 먹는데,  살에다가 숟가락을 가져다 대면 수저 머리가 저항감 없이 살점 안에 폭 파묻히는 것이 마치 연두부와 비슷한 질감이다. 국물과 함께 한 술 뜨면 이로 씹을 필요도 없이 입천장으로만 살짝 눌러도 목젖을 타고 훌훌 넘어가는 그 식감이 일품이다. 껍질 부분은 미끄덩한 것이 호불호가 심하게 갈린다. 혹자는 콧물 느낌이 난다고까지 표현하며 질색을 하지만, 난 그 느낌을 극도로 좋아한다.


동해안에서 곰치국을 시키면 어느 곳을 들어가도 대개 비슷한 그릇을 받는다. 멀겋게 끓여낸 김칫국에 대파 몇 조각, 허옇고 몽글몽글한 생선 살점이 들었다. 국물은 칼칼하고 시원하다. 싱싱한 해산물이 반갑다며 한 잔, 바닷가 짠내가 반갑다며 또 한잔 하다가 엉망이 돼 버린 위장을 달래주는 뜨끈한 국물이여. 곰치국은 동해안 여행을 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먹고 오고야 마는 나의 힐링 푸드다.


정약전 선생의 '자산어보'에도 꼼치, 물메기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책에는 해점어(海鮎魚)라고 표기돼 있는데, 우리말로 풀어보면 바다메기라는 뜻이다. '살과 뼈는 매우 연하고 무르며 맛은 싱겁고 곧잘 술병을 고친다'라고 쓰여 있다. 이 구절을 알고 난 다음부터는 플라세보 효과인지, 곰치국만 먹으면 말끔하게 해장이 되는 느낌이다.



멀겋게 끓여낸 김칫국에 대파 몇 조각, 순두부 같은 생선 살점이 들었다. 국물은 칼칼하고 시원하다.

바람이 세차게 불고 때때로 빗방울도 흩날리던 어느 날, 강원도 묵호항 근처에서 먹은 곰치국이 나의 '인생 곰치국'이다. 자부심이 대단한 사장님의 설명을 듣고 나니 더 꿀맛이었다.


"후포에서 통발에 홍게를 넣어 잡은 꼼치라 표면이 상처 없이 깨끗하잖아요. 그물을 쳐서 일주일 만에 건져 올린 것들은 이미 죽어서 부패하기 시작한 생선이지. 우리 집은 살아있는 꼼치로 국을 끓이니까 살이 풀어지지 않았잖아요."


바닷가 사람들만 알음알음 먹던 것이 이제는 전국적으로 소문이 나 가격이 뛴 것이 매우 아쉽다. 수요에 비해 공급은 한정적이다 보니, 이 맛을 모르는 사람들이 한 그릇에 2만 원 하는 해장국에 선뜻 지갑을 열기란 쉽지 않다. 1만 5000원인 줄 알고 찾아왔다가 오른 가격을 보고는 발길을 돌리는 모녀를 보며 마음속으로 '가지 말고 앉아서 한 술 떠봐요!'를 애타게 외쳤다.


"우린 수놈만 써요. 암놈은 큰 것도 5만 원 밖에 안 하는데, 수놈은 30만 원이니 한 그릇에 2만 원씩 받고 팔아도 남는 게 없지. 그래서 돌아나가는 손님을 붙잡지도 않아."




꼭 곰치국을 고집하지 않더라도 그 지역 특산물이나 서울에서 접하기 어려운 생선으로 끓인 해장국은 언제나 환영이다. 예정에 없이 당일치기로 새벽바람을 가르고 달려간 속초에서는 장치 매운탕을 먹었다. 장치의 정식 명칭은 벌레문치인데, 동해안에선 긴 물고기라는 뜻의 장치라고 부른단다. 길쭉한 것이 장어같이 생겼는데 훨씬 더 두툼하다. 사실 곰치국을 먹으러 간 것인데 너무 비싼 값에 주저하다 장치가 눈에 들어온 것이었다. 탄력 있는 살점에 껍질도 쫄깃하니 한참을 퍼먹어도 전골냄비에 아직 살이 그득해서 지출은 예상보다 적었지만 포만감은 배가된 푸짐한 한 상이었다.


반다찌를 알차게 즐겼던 통영 여행에선 다음날 해장음식으로 복국을 찾았다. 둘이 소주 세 병에 맥주 두 병을 마셔 속이 알콜에 할퀴어진 느낌이었는데, 미나리 향 가득한 시원한 국물이 생명수처럼 달았다. 참복이 살 떼어먹는 맛은 더 있지만, 쫀득한 식감을 좋아하는 나는 졸복도 충분히 좋았다. 서울에도 유명한 복집이 있지만 아무래도 생선살밥은 적어 아쉬운 감이 있는데, 바닷가 근처 시장통의 복집에는 고기가 섭섭지 않게 들어있어서 부자가 된 느낌이었다. 통영의 복집에서는 멸치회무침을 같이 내어주는 경우가 많은듯했다. 복 국물로 응급처치를 하고 나니 갖은 야채 위에 통통하고 비린내 없는 생멸치를 올리고 초장을 부어 나온 멸치회에 젓가락이 갔다. 좀 전까지만 해도 속이 불편해 컨디션이 안 좋았는데, 해장술 생각이 나는 내가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뚝배기 가득 복어 살점이 들어있던 통영의 복국과 한정식집 안 부러운 군산의 아귀백반.

군산에선 아귀 백반을 먹었다. 아귀는 찜이나 수육으로 먹어본 서울 촌사람, 아귀탕에도 반했다. 한 냄비 나오는 아귀탕만 해도 쓸만한데 조기구이며 게장, 잡채, 갖가지 김치류와 나물들까지 한 상 차려져 백반이 아닌 한정식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이런 상차림이 1인 8000원이라니 근처에 이런 곳이 있다면 난 집에서 밥을 하지 않겠다.


다시 찬바람이 부는 계절이 돌아왔다. 기온이 낮아지면 생선이 살찌고 기름기가 오른다. 곰치며 장치며 복이며 아귀며 다 겨울이 제철이다. 해장하기 위해 술을 마시는 주객전도 알콜로드를 떠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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