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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쏨땀쏨땀 애슐리 Sep 18. 2021

반다찌 혹은 실비집, 코리안 할매카세

통영, 군산 여행의 목적

제철 해산물, 그 지역 특산물이 주로 상에 오른다. 나오는 음식은 그때 그때 다르다. 그냥 주는대로 먹는다. 술은 많이 마실수록 미덕. 그럴수록 더 귀한 안주가 나온다. 술쟁이들에겐 천국 같은 곳, '실비집'이다.


일주일 간의 남해안 여행을 마치고 서울 톨게이트를 통과하면서 나도 모르게 맘 속에 있던 말이 툭 나왔다. "통영에 1년만 살아보고 싶다." 관광객이 아닌 현지인으로서 통영을 접하고 싶은 데에는 실비집의 역할이 크다.




통영 다찌집의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있었다. 고된 뱃일을 하고 돌아온 어부들의 술상, 다찌. '선 채로 마신다'는 뜻의 일본어 '다찌노미(たちのみ)'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예전엔 술을 시키면 안주가 따라 나왔다고 한다. 손님이 술고래여야 밑지지 않는 구조다. 통영의 이 특이한 술문화가 전국으로 퍼지면서 술은 적게 마시고 안주만 축내는 관광객들이 몰려들어 '한 상에 얼마', 혹은 '1인에 얼마' 식으로 바뀌었단다.


방송에도 나왔다는 유명한 다찌집들의 상차림은 서울에도 있는 횟집의 회정식과 다를 바 없어보였다. 가격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주로 현지인들이 간다는 '반다찌', '실비집'을 찾아 나섰다. 포털사이트에 정보가 아예 없는, 찐으로 현지인 맛집일 수 밖에 없는 한 곳의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6시도 안 된 시간에 딱 한 테이블이 비어있었다.


"원래 우린 외지인은 안 받는데..."라는 사장님 말에 서운해서 눈물이 쏙 날 뻔 했는데, 내 눈빛이 슈렉고양이 같았는지 마지막 테이블이 허락됐다. 사장님 말이 거짓말은 아녔던 것 같다. 우리 테이블을 제외하고는 모두 단골 손님인 듯 했고, 언니동생, 호형호제하는 단골들이 테이블이 비면 전화를 달라는 말을 하고는 아쉽게 돌아섰다.

통영 반다찌에서 먹고 마신 것들. 소주가 술술 들어가는 해산물의 향연.


초겨울 통영의 술상에는 통통하고 뽀얀 굴, 기름진 밀치회, 새콤달콤한 양념이 입맛을 돋우는 멸치회무침, 노릇노릇한 볼락구이, 바다내음 가득한 멍게 등이 올라왔다. 바다를 품은 한 상이 술 두 병을 포함해 단 돈 3만5000원이다. 술 두 병을 추가해 둘이 술도 해산물도 양껏 즐기고는 4만5000원을 냈다. 저렴해서 황송한 가격이다.


외지인은 안 받는다며 방어적으로 대했던 사장님이 "새댁이 우리 며느리를 꼭 닮았다"고 했다. 알콜기운이 올라 세상이 아름답게 보인 나는 "아이고, 벌써 며느리를 볼 연세로는 안 보인다"고 화답했다. '이렇게 푸진 술상을 매일 받을 수 있게 이 가게 단골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통영에 살아보고픈 1순위 이유다.




서해를 접한 군산에도 실비집 몇 곳이 있다고 들었다. 목적지는 경남 남해군이었는데 한 번에 가긴 힘들겠다며 여러 중간 도시 중에서도 굳이 군산을 들른 것은 실비집 외엔 다른 목적이 없었다.


다들 누나, 언니 하는 것을 보니 군산의 실비집에서도 역시 외지인은 나 하나인 모양이었다. 술은 직접 꺼내 마시면 되는건가 곁눈질을 하다가 맥주 한 병을 꺼내오는데 "안주 준비 아직 안됐어, 맘 바빠지니까 천천히 마셔"하고는 혼이 났다.

병어회, 돌게장, 간장새우, 소라숙회, 갈치구이, 조기찌개 등이 맛깔났던 군산의 한 상.


뼈째 썬 병어회를 초장에 찍어먹다가 또 혼이 났다. "깻잎이랑 고추 같이 줬잖어. 쌈장넣어서 싸먹어야지 그냥 먹으면 어째." 할머니 말대로 했더니 역시 더 맛있긴 하네. 군산 할머니는 "내가 비벼줄테니 이리 줘봐. 나 손 씻었다" 하고는 돌게장 속살을 파내 비빔밥을 해 주시거나, 조기찌개의 병권을 나한테 넘겨 "국물 바글바글하면 조기 넣어서 같이 끓여라" 하셨고, 뭐가 제일 맛있었냐 물으시기에 병어회를 말했더니 "맛있다면 줘야지, 안주고 어찌 배겨"하시기도 했다. "맛나고 푸지게 먹었는데 이것만 드려도 되나"라는 말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취하면 낯짝이 두꺼워져서 그런가 왜 이렇게 주접을 떠는지. 그런데 "맛있게 먹었으면 됐다. 그랬으면 됐지."란 답이 돌아왔다.


서양 음식점셰프 스페셜(chef special), 일본 오마카세(お任せ)가 비교적 비싼 가격에 특별한 날 먹는 정찬의 느낌이 있는데, 상을 차리는 '실비'만 받고 술을 판다는 실비집은 태생적으로 가격이 저렴할 수밖에 없다. 맛은 뒤질 일이 없건만 마진이 적다보니 어머니나 할머니 연세의 여성 요리사가 자신의 노동력을 갈아넣어야 가게가 굴러간다는 점이 안타까운 일이다.


배달어플 후기가 영업장의 명운을 결정하는 시대에 투박한 할머니가 안주를 툭툭 내어주는 이런 실비집은 호불호가 많이 갈릴 것이다. '할머니 맘대로' 할매카세에서는 반찬투정도 아니될 말이니. 어쨌든 나는 '호', '극호'다. 해산물 킬러고 술도 많이 먹을 자신이 있는데, 근처에 살면 일주일에 세네번은 올텐데 서울에 사는게 아쉽다. 만약 서울을 떠나 살 기회가 있다면 반드시 바다를 낀 동네, 실비집이 있는 동네에 살고 말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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