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 작가 에밀리 파인의 몸에 대한 에세이
임신중지가 불법이었을 뿐만 아니라 피임도구를 판매하는 행위조차 금지되었던 아일랜드에 변화의 바람이 본격적으로 불어온 건 1990년대였다. 성폭행 피해로 인한 임신으로 자살을 시도하다 임신중지를 위해 영국으로 가고자 했지만 법에 의해 금지당한 14세 소녀의 상황이 알려지면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진다. 이때가 1992년. X케이스로 알려진 이 사건은 아일랜드 시민들의 공분을 샀고, 이 일이 사회적으로 크게 공론화가 되자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낙태죄 폐지 운동이 일어난다.
때맞춰라고 해야할까 아니면 사회 분위기의 영향일까. 연이어 카톨릭 사제들의 아동성범죄가 폭로되면서 카톨릭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것도 변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90년대부터 경제가 다시 활성화된 아일랜드의 경제적 상황도 변화의 동력이 되었다. 아일랜드는 켈트의 호랑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할 정도였는데 이주노동자들이 이 경제성장에 큰 역할을 했다. 그러므로 다양성에 대한 이해가 사회적으로 점점 더 필요해졌고. 그 모든 것의 전제는 보편적 인권의 확대였다.
여성과 성소수자의 인권이 사회 변화의 최전선에서 싸움을 벌였고, 2015년 동성결혼 국민투표와 2018년 낙태죄 폐지 국민투표에서 모두 극적인 진전을 거두었다. 그것도 국민투표라는 방법으로. 2018년 갔던 아일랜드에서는 동네 창문마다 무지개 깃발이 꽂혀있었고 서점마다 페미니즘 책이 눈에 띄게 진열되어 있었다. 아일랜드 사람들은 자신이 얼마나 포용적인지를 앞다투어 보여주고 싶어하는 분위기였다. 그렇게 사진을 찍어주겠다고들...하여간 이 얘기를 왜 하나면 에밀리 파인의 책을 추천하려고.
이 책은 2018년 아일랜드의 작은 페미니스트 독립 출판사에서 출간되어 큰 인기를 끌었다. 추천사를 쓰기가 좀 어려웠다. 나는 이 책을 '중독'에 대한 책이라고 생각했는데 출판사에서는 그런 규정이 독자들에게 책을 좀 좁게 가둔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여간 이 책을 두 가지 키워드로 말하자면, 몸과 중독에 대한 책이라고 생각했다. 몸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아무 것도 최종적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모두가 그저 과정일 뿐이다. 그 의미를 붙들고자 하는 행위들은 대체로 중독적이 되기 쉽다. 아버지의 알콜중독, 불임과정에서의 집착, 자위와 생리와 섹스에 대한 이야기, 일중독자...몸을 도구이자 기능으로 인식하는 사유체계를 넘어가려면 필연적으로 말해지지 않은 것들을 말함으로써 흐를 수 있게 해야 한다. 에밀리 파인의 책이 하려고 했던 게 바로 이런 작업이었다.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금지된 이들은 자신이 몸이라는 것, 그리고 동시에 몸이 자신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한다. 추천사에도 썼지만, "몸을 통해 과잉결정된 여성들은 필사적으로 몸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싶어한다. 여성의 가치를 몸을 통해 규정하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이 자기 자신의 몸을 통해 경험한 세계를 스스로의 언어로 표현하고 세계에 의미를 전달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데 이 책에서 에밀리 파인은 바로 그걸 해낸다. 침착하고 집요하고 솔직하게.
이 책을 아일랜드의 역사적 맥락에서 보자면, "임신중지를 범죄가 아니라 보건서비스"(그레이스 윌렌츠 국제앰네스티 아일랜드지부 캠페인 조사담당관이 한 말이다)라고 인식하게 되면, 어떤 말이 흐르는게 가능해지는지를 알려주는 책이기도 하다. 낙태죄가 폐지된 이후의 세계에서 흐를 말들이 새삼 기대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몸으로 규정당해와 몸이 억압의 근원이었던 이들에게 다시 마이크가 주어지면 말들을 넘쳐 흐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