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불, 시작
도시전설이 된 퍼포먼스를 볼 기회
"이불이라는 작가가 있는데, 여기 대학로에 나타나 행위예술을 했을 때 완전히 난리가 났었어"
P선배가 담배연기를 내뿜으면서 말했다. 혜화역에서 다른 일행을 기다리는 중에 툭 나온 말이었다. 정치경제학 세미나에 P선배가 감흥을 점점 잃어가는 중이라는 건 한참 전에 알고 있었다. 누가 먼저 깰 건가를 두고 벌이는 눈치게임 중이었다. 그때 선배가 혼잣말처럼 뱉은 말을 나는 냉큼 받았다
"이불이요? 사람 이름?"
툭 던진 말에 반응을 하자, 선배는 흥이 좀 났는지 각지에서 벌어진 행위예술 퍼포먼스에 대한 설명을 해주고 이불의 작업을 직접 본 얘기를 해줬다. 죽은 물고기를 물에 넣더니 그 물에 풍덩 들어가 손으로 물고기의 배를 갈랐다던가. 옷을 모두 벗고 음모도 다 드러난 채 거꾸로 매달렸던 전시를 못 본 게 한이라던가 그런 말을 했다.
"에. 고만 얘기해요"
그 선배가 남자가 아니었다면 거기서 멈추라고 하진 않았을지도 모르겠지만 점점 열을 올리며 말하는 모습이 불편해져서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궁금했다. 그 이후에 동숭아트센터를 지나갈 때 이불 전시 얘기를 꺼낸 사람이 몇 더 있었다. 직접 본 사람은 없었다. 나에게 이불이란 이름은 그야말로 90년대의 도시전설.
이번 서울시립미술관 이불, 시작 전시. 바로 그때의 전설의 퍼포먼스 기록영상이 상영된다고 했다. 전시 소식을 가끔 공유하는 고등학교 친구가 이불 전시를 보고 와서 같이 떠들고 싶다며 사진들을 보내왔다. 알았어. 다녀와서 얘기하자. 그렇게 좋아? ㅇㅇ 완전. 난 초기 작품 이렇게 좋을 줄 몰랐네.
그리고도 벼르다가, 지난 4월 8일에 다녀왔다. 10년 전 스스로 그만둔 시장을 다시 뽑아 올린 오래된 현재에 깊이 씁쓸했던 날이었다. 이불의 시작을 보기에 더없이 적합한 날이었다.
지금까지 봤던 전시 중 가장 오랫동안 머물렀다. 12개의 퍼포먼스 영상을 다 봤으니까. 1989년 제1회 한일 행위예술제에서 있었던 그 유명한 <낙태>도, P선배가 말했던 <물고기의 노래>도 있다. <수난 유감-내가 이 세상에 소풍 나온 강아지 새끼인 줄 아느냐>도, <도표를 그리다>도, 다 있다. 열 두 개의 퍼포먼스 영상이 전시된 전시실에서 꼬박 세 시간은 있었던 것 같다.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낙태>가 기억에 남는다.
작가는 낙태의 죄의식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죄의식의 부정을 부정한다. 이 이중부정은 여성 개인의 사적 고난 경험에 머물러 스스로를 갉아먹도록 했던 죄의식을 참여한 모두에게 이전시킨다. 작가는 눈앞의 직접적 고통을 만들어 이 문제에 관객을 연루시킬 뿐만 아니라, 끈으로 '매어 달림'을 형상화시킴으로써 한편에서는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형상으로 다른 한편에서는 본디지 사도마조히즘을 연상시키며 성과 속, 공과 사의 이분법을 효과적으로 해체시킨다. 이토록 급진적일 수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지금 하고 있는 다른 전시는 herstory: review. 시간이 부족해 정정엽, 김인선의 그림 몇 개만 보고 왔다. 당시 페미니즘 미술제의 이름은 '여성과 현실'이었다.
허스토리는 기획 상설전이니 나중에 다시 찬찬히 보러 가야지.
이불, 시작. 전시는 5월 16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