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정의 인터뷰를 찾아보다가 엄마 생각이 부쩍 났다. 엄마는 윤여정 배우와 동갑이기도 하고, 무엇보다말을 참 재미있게 하는 사람이다.엄마가 스스로 약간 찔려하면서 혹은 약간 미심쩍어 하면서 논리적 점핑을 할 때가 있는데, 그 순간에 말의 기세를 붙여서 어느새 홀딱 넘어가게 하는 순간이 있었다. 아 저걸 말솜씨라고 하는구나. 라고 나는 종종 감탄하고는 했다. 예컨대 엄마는 오빠를 챙기는 이유를 "니 오빠가 몸이 약하잖니". 라고 설명하곤 했다. 엄마의 오빠 그러니까 외삼촌도 몸이 약해서 엄마가 늘 챙겼다고 덧붙였다. 하나뿐인 아들을 무척이나 귀하게 키우면서도 딸 둘이 그걸 성차별이라고 생각할까봐 신경쓰는 엄마가 가끔 웃겼고 대체로 좋았다. (막내의 처지란게 그렇다. 어쨌든 신경을 써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 하는게 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당시 초등학교 5학년 말에 전학을 와서 새로운 학교 분위기에 적응을 못하고 있었다. 특히 적응하기 어려웠던게 욕이었다. 여기 애들은 너나할 거 없이 어른같은 욕을 했다. 처음에는 내심 커다란 충격을 받았으나 적응하는데 오래가지는 않았다. 일단 그런 욕을 내가 스스로 내 입에 올려봤을 때의 쾌감이 대단했다. 남자애들이 칠판에서 쎄엑스 같은 글자를 하루는 영어로 하루는 한글로 쓰면서 여자애들을 놀리곤 했고 ㅂㅈ라는 말을 욕으로 하며 ㅈ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는 남자애에게. 나도 배운대로 욕을 돌려줬다. ㅈ도 아닌게 ㅂㅈ가 어쩌구 하는 욕에, 그럼 넌 ㅈ이냐 ㅈㅈㅅㄲ야 뭐 그런 식으로...그러면서 입이 점점 걸어졌고, 그게 좀 인기도 있길래...점점 더 심해지던 차였다.
해선 안될 욕을 입에 올리는 쾌감에 빠져있던 나는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오빠에게 용돈을 갈취당해 분에 겨워 있었는데 그 와중에도오빠를 도와주라며 편드는 엄마아빠에게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자리를 박차고 나와
크게 ㅆㅍ (ㅆㅂ도 아니고 더 된소리로)이라고 욕을 했다.
아빠가 엄마에게 물었다."쟤 뭐래?" 내 입으로 그 소리를 발음하고도 내심 놀라서 아 어쩌지. 큰일났네. 미쳤나. 심장소리가 쿵쿵거리던 차였다. 그때 엄마는 아주 담담하게 답했다. "싫대잖아"
띠요옹. 그럴리가 없다고 생각했나 아니면 재치있게 상황을 넘겼으니 잊어버린걸까. 하지만 엄마 특유의 그 설득력있는 말투로 쿨하게 저렇게 답하니, 나조차도 내가 내뱉은 말이 ㅆㅍ이 아니라 싫다라고 말했나 헷갈렸을 정도였다. 하여간 나는 그 이후로 절대 최소한 집에선 욕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이렇듯 엄마는 설득의 달인이라기보단 말 자체에 흡입력이 대단했다. 뭘 얘기해도 엄마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게 하는 재능이 있었달까.
한번은 남자애의 배 위에 올라타서 주먹질을 한 적이 있다. 그때 담임에게 불려간 엄마는
"현영이가 얼마나 순한데...먼저 건드리지만 않으면 절대 먼저 그럴 애가 아니예요"
라며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나에 대해 관찰해온 얘기를 풀었다. 동네에서 내 별명은 '땡삐'였는데, 어릴 때는 상당히 귀엽고 순하게 생겨서(진짜다), 동네 아저씨들이 자꾸 손을 댔던 모양이었다. 엄마 말에 의하면 귀엽다며 말을 걸면 눈을 마주치지도 않고 고개를 까닥 인사만 했고, 그때 손을 잡아끌거나 머리를 쓰다듬기라도 하면 하지 말라고 그렇게 소리를 빼액 질렀다고 한다. 혼자서도 몇시간이고 책을 보기도 하고 재밌는게 있으면 아무도 귀찮게 굴지 않았다는데, 나를 귀찮게 하는 건 무척 싫어했다는 얘기를 다양한 사례를 곁들어 담임에게 한참을 얘기했다. 엄마는 쟤가 주먹질을 했다면 분명히 상대가 먼저 귀찮게 했을 거라며 이야기꾼의 마지막 종결을 지었고, 담임은 어느새 사건의 핵심(주먹질)은 잊고 엄마 얘기에 빠져들었다. 담임은 싸움에 대해서는 더이상 언급하지 않고 "어머님 말씀 참 재밌게 하시더라"고 몇 번이나 말하곤 했다.
윤여정 같은 74세를 본 적이 없다고들 하는데, 아마 엄마에게 사회진출의 기회가 주어졌더라면 윤여정과 결이 아주 비슷한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예민하고 지적이고 웃긴 사람. 그리고 기막히게 말을 잘하는 사람. 그 말을 끊임없이 듣게 하고 싶은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