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그리트 폰 욀하펜, 팀 테이트, <나는 히틀러의 아이였습니다>
정체성 정치는 문화적 인정투쟁으로 소급할 수도 없고, 당사자주의라는 운동주체 문제로 환원할 수도 없다. 무엇보다 피억압/피지배의 문제에 대한 집단적 투쟁을 정체성 정치라고 배치하는 것이 제일 이상하다. 모든 정체성 정치는 기본적으로 생존의 문제라는 점에서 계급 투쟁과 상반되거나 보충적인 개념으로 쓸 수 없다. 계급 투쟁 자체가 어떤 노동자의 무슨 노동에 기반하는지를 질문하지 않는 것도 문제고. 그럼에도 정체성 정치라는 말을 일종의 정치적 올바름 강박 정도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 건 왜지. 이 무지와 오독은 무의식적인 것인가 아니면 무지에의 의지인가, 정체성 정치에 대한 오독과 오해 그리고 미국과 유럽 출신 학자들의 차이에 대해서 생각하다가 이 책이 생각나서 손에 들었다. 히틀러의 잃어버린 아이, 한국어판으로는 "나는 히틀러의 아이였습니다"라는 제목으로 출간.
잠깐 들춰보려다가 단숨에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어버렸네.
과거를 돌아보려다 생각지도 못했던 역사를 알게된 저자. 하지만 이미 저자가 태어났을 때 존재했던 나라는 산산조각이 나서 사라진 상태였다. 위탁가정의 부모가 나치에 어느 정도 가담했는지 늘 조마조마한 마음이었던 저자는 우연한 기회에 자신의 친부모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게 되고, 자신이 하인리히 뮘러의 악명높은 우생학 프로젝트의 일환이었던 레벤스보른과 연결되어있다는 것을 알아낸다. 하인리히 뮘러는 아이들의 '인종 가치'를 4가지 등급으로 나누고 그 중 최상위 등급으로 분류한 아이들을 아리아인의 혈통을 보존한다는 명분으로 부모로부터 떼어낸 뒤 독일가정에 위탁보육을 시켰다.
이것이 바로 레벤스보른 프로젝트.
"내가 발견한 문서에 따르면 나는 '민족독일'인소녀, 에리카 마트코로 태어났다. 나는 독일화를 위해 자우어부른에서 코렌-잘리스의 레벤스보른 시설로 이송되었고, 그 후 '진짜' 독일 소녀로 키워지기 위해 폰 욀하펜 부부에게 건네졌다. 나는 '총통께 아이를 바치'는 계획의 일부였다. 나는 히틀러의 아이였다" (161)
1949년 5월 국제난민기구에서는 내부보고서에서 이런 상황에 대해 이렇게 언급한다. "아이들 하나하나의 잃어버린 정체성이야말로 오늘날 유럽 대륙의 사회문제다". 시몬 베이유는 같은 해에 "뿌리내림은 가장 중요하면서 간과되는 인간 영혼의 욕구"라고 했는데, 이는 전후라는 시간성 속에서 특히 두드러진 문제이지 않았을까 싶다.
열등과 우등, 지배와 피지배, 가해와 피해 등의 문제는 한 인간 내에도 그리고 가족관계와 국제관계에서도 다 얽혀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사람이고 싶고 어디에 속하고 싶은가 등의 존재론적 질문의 부상은 전후 인간성 회복의 과정이기도 했다.
레벤스보른의 아이들 중 질병과 장애가 있는 아이들은 아동병원에서 살해되었다. 종족의 순수성과 강인함의 신화를 지켜내기 위해 살해된 아이는 알려진 것만 147명이었다. 생존자인 루틸트 고르가스는 "우리는 완벽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질병과 장애를 갖고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레벤스보른으로 온 아이들은 친부모 몰래 유괴된 경우도 있었고, 혼외관계의 아이를 감당할 수 없었던 가족에 의해 보내지기도 했다. 하인리히 뮘러는 전쟁 중 출생율이 계속 떨어지자 독일 병사들에게 양육은 나라가 해줄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캠페인을 지도하기도 했다.
"역사의 교훈은 우리가 역사에서 배운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게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이다.
무엇을 배울 것인가. 이 책을 읽고 나치의 기록관리를 배우자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무엇을 배울 것인가라는 질문은 중요하다. 나치의 우생학 프로젝트에서 가장 늦게 알려진 비극이 바로 이 레벤스보른 프로젝트였다. 이 프로젝트는 어떤 이분법적 프레임으로도 쉽게 드러날 수 없었는데, 당사자인 여성과 아이에게 양가감정과 수치심을 주입했기 때문이고, 정상가족이라는 외피로 감싸두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가 역사에서 배워야할 것은 우생학은 열등이든 우등이든 그렇게 분류된 인간 모두에게 치명적이고, 진짜/가짜, 열등/우등 이러한 분류방식 자체가 문제라는 것이며, 정상성을 떠받치는 건 약자들의 수치심이란 것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 수치심을 버리자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다.
나는 수치심은 중요한 감정이라고 생각하는데, 내가 꿈꾸는 행복한 결말은 약자가 복수에 성공하는 스토리가 아니라 강자가 자신이 한 행동의 의미를 깨닫고 수치심의 심연으로 스스로 걸어들어가 그 안에서 문을 잠그는 것이다. 하인리히 뮘러가 자신이 죽인 생명만큼 다시 태어나서 수치심의 심연 속을 맴돌기를, 그래서 다시는 태어나지 않게 해달라고 신에게 간절하게 기도하게 되기를.
잉그리트 폰 욀하펜, 팀 테이트, 강경이 옮김, <나는 히틀러의 아이였습니다>, 휴머니스트,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