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생기담은 철학 Jun 07. 2023

아홉번째 길. 상식의 충돌

날아가는 화살은 어느 순간에 어느 지점에 있게 된다.
그 다음 순간에도 한 지점에 머물러 있게 된다.
화살은 항상 머물러 있으므로 날아가는 화살은 날아가지 않는다.
- 제논 - 


동영상은 일종의 눈속임이라고 할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제논은 이런 눈속임에 속지 않으려 했다. 제논은 운동에 관한 흥미로운 역설들을 제시하였는데 그 중에 화살의 역설이 있다. 이 역설을 동영상의 경우로 바꾸면 정확히 일치한다. 

"동영상의 어느 한 장면은 정지 화면이다. 동영상은 정지 화면들로 만든 것이므로 사실은 동영상이 아니다."

제논의 말처럼 수많은 사진들을 모아 놓는다면 동영상이 아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정지화면들이 동영상이 된 이유를 알고 있다. 기계들이 정지화면들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빨리 돌리고 있기 때문에 정지화면들은 동영상처럼 보이게 된다.


과학자 중에 제논처럼 운동에 대해 엉뚱한 생각을 한 사람이 있었다. 양자역학의 기초를 만든 물리학자들 중 한 명인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원자 안에서 전자가 움직이는 운동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었다. 

실험을 통해 알려진 전자의 움직임은 그당시 물리학자들이 운동에 대해 이해하고 있던 바와 맞지 않았다. 전자는 매끄러운 운동의 동영상을 보여주지 않고 않고 특정 위치에서만 확인되었다. 

고민하던 어느날 하이젠베르크는 밤거리의 가로등 밑을 지나가는 사람을 보고 전자의 움직임이 그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람이 가로등 아래서만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던 것처럼 전자는 연속적으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도약하듯이 나타난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이젠베르크는 다른 물리학자들보다 먼저 매끄러운 운동이 눈속임임을 인정하고, 사라졌다 나타나는 운동의 규칙을 행렬역학과 불확정성의 원리로 만들었다.


날아가는 화살의 역설을 피하는 답은 보통 이렇다. 

"시간이나 운동은 수직선에 비유할 수 있다. 길이를 갖는 수직선은 길이가 없는 점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길이를 갖는 작은 선들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처럼 시간이나 운동은 제논의 말처럼 멈춰진 순간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폭을 갖는 흐름과 움직임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 대답은 우리의 일상적인 상식과 맞고 그동안 말해온 이어짐이 갖는 선의 의미와도 잘 맞는다. 수학에서 미분방정식은 선의 특정한 지점에 숨어 있는 흐름을 계산할 수 있게 해준다. 이렇게 해서 시간과 화살은 매끄럽게 흘러가고 날아갈 수 있어 보인다. 

그러나 미세한 양자의 세계에서 그런 매끄러운 이어짐은 더 이상 상식이 아니었다. 우리가 아는 상식적인 이어짐은 사실은 눈속임이었고, 모든 눈속임이 그렇듯 세밀함의 한계가 있었다.

 

매끄러운 이어짐이 눈속임이 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이음은 다름을 불러온다. 시간이나 공간상의 위치가 달라질 수도 있고, 모양이나 성질이 달라질 수도 있다. 

화살이 멈추지 않고 날아간다는 것은 작게 나눠봤을 때도 화살은 어떤 위치에 있으면서 바로 다음 위치에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시간과 운동의 폭이 채워진다. 

그러나 이렇게 두 위치에 있어야 하는 화살은 더이상 상식적인 사물이 아니다. 이어짐의 상식과 경계가 명확한 사물의 상식은 우리가 알아채지 못하는 미세한 영역에서 서로 충돌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논은 두 상식의 충돌을 먼저 발견했던 것이다. 


뭔가 달라졌다는 것은 달라지기 전과 후의 구분이 생겼다는 말이다. 그것은 동영상에서 한 장면과 다음 장면의 차이가 있는 것처럼 명확한 구분점이 생겼다는 것이고, 두 장면을 빠르게 넘기는 활동이 있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여기에서 이어짐의 눈속임이 필요하게 된다. 잇는 활동은 겉으로 드러나지 못한다. 다른 상황을 잇는 중간 과정은 드러낼 수 있는 명확함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제논과 그의 스승 파르메니데스, 그리고 이에 영향을 받은 플라톤은 생성의 이러한 불확실함을 명확히 고정된 성질들(예컨대 이데아)과 대비시켜 허상이라고 말했다.


이어짐에서 다른 상황을 만들어내는 것과 달라진 상황을 드러내는 것은 모두 필요한 일이다. 연속적인 과정은 이어짐을 만드는 적극적인 활동이다. 그러나 연속적인 흐름만으로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리지 못해서 동영상은 나오지 않고 화살은 날아가는 모습을 보일 수 없다. 반대로 명확한 상황을 알려주는 구분점들만으로는 그 확실함으로 인해 이어지고 달라지는 과정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더구나 동영상에서는 다음 장면이 정해져 있지만 날아가는 화살은 다음 상황을 미리 알지 못한다. 갑자기 바람이 불어올 수도 있고 장애물이 있을 수도 있다. 현실에서 다음 장면은 미리 구분해서 표시할 수 있게 정해져 있지 않은 것이다. 

날아가는 화살은 진짜 라이브 영상으로 이음과 다름을 매순간 즉각적으로 교차하며 매끄러워 보이게 날아간다. 화살과 빛이 이어지는 만남은 영상의 한 점 한 점을 그때마다 다르게 표시한다. 




젊은 베르너는 생각에 잠겨 공원을 걷고 있습니다. 공원은 어둡습니다.(1925년이니까요) 흐릿한 가로등 몇 개만 여기저기 작은 빛의 웅덩이를 만들고 있을 뿐입니다. 빛의 방울들 사이에는 넓은 어둠의 공간이 펼쳐져 있습니다. 갑자기 하이젠베르크는 한 사람이 지나가는 것을 봅니다. 사실은 지나가고 있는 과정의 사람을 본 것이 아닙니다. 그가 본 것은 한 사람이 한 가로등 아래에서 나타난 뒤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이윽고 다른 가로등 아래에서 다시 나타나서는 또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입니다. 그렇게 계속해서 한 빛의 웅덩이에서 다른 빛의 웅덩이로 건너가다 밤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립니다. 하이젠베르크는 '당연히' 그 남자가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한 가로등 빛과 다른 가로등 빛 사이의 그 남자의 진짜 궤도를 상상으로 재구성할 수 있으니까요. 어쨌든 사람은 크고 무거운 물체이고, 크고 무거운 물체는 그냥 나타났다가 사라졌다가 하지는 않는데......

'아! 이런 크고 무거운 물체들은 사라지고 다시 나타나고 하지 않지, 하지만 전자에 관해서는 무엇을 알지?' 그의 머릿속이 번쩍합니다. '만일 전자 같은 작은 물체들에서는 이 '당연함'이 더 이상 들어맞지 않는다면? 만일 실제로 전자가 사라지고 다시 나타나고 할 수 있다면? 만일 원자의 스펙트럼 구조의 근저에 이러한 신비로운 '양자도약'이 있는 것이라면? 만일 다른 무언가와 어떤 상호작용을 하고 또 다른 상호작용을 할 때, 그 사이에 전자는 말 그대로 어디에도 있지 않은 거라면? ......'

...

하이젠베르크는 흥분에 차서 집으로 돌아와 계산에 몰두합니다. 얼마 뒤 그는 당황스러운 이론을 들고 나타납니다. 그것은 입자들의 움직임에 대한 근본적인 기술로서, 이 이론에서는 입자들의 위치는 모든 순간 기술되지 않고 오직 특정 순간의 위치만 기술되는 것이었습니다. 입자들이 다른 무언가와 상호작용하는 순간만 말입니다.*



* 카를로 로벨리, 김정훈 옮김,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 120~121쪽, 쌤앤파커스, 2018.




작가의 이전글 여덟번째 길. 시간도 흐르고 공간도 흐른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