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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기담은 철학 Jun 10. 2023

열번째 길. 생성의 네 바퀴

보이는 것과 비어있는 것은 같다
- 반야심경 -



제논이 운동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기 위해 역설적인 상황을 제시했던 것에 반해, 불교에서는 머물러 있는 것은 없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 역설을 제시한다.

<반야심경>에서는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고 하여 보이는 것과 비어있는 것은 같다고 역설적으로 말한다.


불교의 핵심 존재론은 연기론으로 색과 공의 역설도 연기론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아마도 이어짐으로 생기는 다름의 공존에 대해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함축적으로 표현한 것은 불교의 연기론일 것이다.

연기의 연(緣)은 서로 이어짐을 뜻하고, 기(起)는 다르게 일어남을 뜻한다. 그래서 연기론은 세계의 다른 여럿들이 이어지면서 또 다른 여럿이 되는 생멸과 공존의 상황을 함축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색즉시공의 공은 연기의 잇는 과정이 명확하게 보여질 수 없음을 뜻하고, 색은 연기로 달라진 결과가 나타남을 뜻한다.

<반야심경>의 전체 내용은 색으로 대표되는 여러 가지 다름의 덧없음을 말하면서 모든 것이 공하여 흘러감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주장은 끊임없이 일어나는 생성을 강조하는 <반야심경>에 더 가깝다. 그러나 제논이 말한대로 매끄럽게 이어지는 운동은 불가능하다는 주장 또한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끊임없는 생성은 순간의 머무름에 의지해서는 일어날 수 없지만, 머물지 않고 흘러가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흘러가기 전과 흘러간 후의 차이가 있어야 한다. 어떤 차이를 만들 수 있는 구분되는 요소들 없이는 흘러감도 있을 수 없다.

세계는 이어지고 달라지면서 여럿이 되면서도 하나로 엮이게 된다. 이렇게 지금까지 다뤄 온 두 역설, 여럿이면서도 하나인 역설과 이음이 다름이 되는 역설은 서로 연결된다.

여럿으로서의 세계, 하나로서의 세계, 이어지고 생성하는 세계, 다르게 구분되는 세계는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는 같은 세계의 여러 측면들이다. 여럿이면서 다양한 세계는 역동적인 흐름을 통해 하나로 이어지면서도 각각의 독특한 차이를 드러낸다.


이 네 측면은 자동차의 네 바퀴처럼 함께 달리고 있기 때문에 일부만 강조하고 나머지는 소홀히 했을 때에는 속도를 높일 수도 방향을 제대로 조절할 수도 없게 된다.

여럿으로서의 세계를 강조한다면 각각의 존재는 독립성을 얻겠지만, 존재들 사이의 관계는 불필요하거나 피상적인 관계가 될 것이다.

하나로서의 세계가 강조된다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질서잡힌 세계를 보겠지만, 전체 속에서 개체들은 그 존재 의미를 잃기 쉽다.

이어지고 생성하는 세계가 강조된다면 변화무쌍한 세계를 보겠지만, 각각의 다양한 특성들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부질없는 일로 보일 수 있다.

다르게 구분되는 세계가 강조된다면 다채로운 각각의 특성으로 나타나는 존재들을 보겠지만, 세계의 역동적인 발생은 현란한 속임수로 보일 것이다.

  

극단적인 전체주의와 극단적인 개인주의는 역사적으로 또 오늘날에도 우리의 공존에 여러 상처들을 남겨 왔다. 그런데 그런 관점은 정치사회나 인간관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사고 방식이나 생활 습관이나 언어 속에 무의식적으로 스며들어 있다.

사실 그 두 극단주의는 서로 가깝다. 전체로서의 하나이든 하나 하나의 개체들이든 둘 다 하나의 동일함에 대한 집착이 있다. 그러나 세계의 어느 한 부분을 보더라도 하나로서의 측면과 여럿으로서의 측면이 복잡하게 교차하면서 공존하고 있다. 한 사람의 마음도 수많은 요소들이 들어오고 나가면서 한편으로는 자기만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세계의 모든 부분들에서 이런 공통된 측면이 보이는 것은 세계의 근본적인 존재 양상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세계는 하나도 아니고 여럿도 아니고, 하나이면서 여럿이다. 그렇게 존재하기 위해서는 다양하고 역동적인 일들이 일어나야 한다.

이러한 존재 방식을 이해하고 각각의 상황에 맞게 실천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다.





과일과 씨앗은 같지 않다. 모양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둘은 다르지도 않다. 씨앗과 과일은  떠나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씨앗과 과일이 분리된 것이 아닌 것은 과일은 씨앗을 이어서 생기기 때문이고, 불변한 것도 아닌 것은 과일이 생기면 씨앗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원효, <금강삼매경론> 72경문에 대해 논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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