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 정호승 '봄길' 중에서 -
세계는 서로 다른 여럿이 이어지고 다시 달라지면서 현실의 일들을 만들어 가고 있다. 그 일들의 내용은 반복되는 평범한 일일 수도 있고, 놀랍고 충격적인 일일 수도 있고, 재밌고 흥미로운 일일 수도 있다.
우리말 '일'은 그 어떤 내용이라도 담을 수 있는 유연함이 있다. 태초에도 어떤 일이 있었을 것이다. 아주 먼 어느 별에서도 어떤 일이 있을 것이고, 아주 먼 미래에도 어떤 일이 있을 것이다.
아주 작은 소립자들의 세계에서 무슨 일들이 일어나는지를 알기 위해 많은 과학자들이 일하고 있다. 역사책을 가득 채운 지난간 일들이 있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꿈 같은 일들도 있다.
고민하고 걱정하는 일, 슬퍼하고 기뻐하는 일, 생각하고 글을 쓰는 일들도 있다. 나눠진 여럿이 이어지는 것도 일어나는 것이고, 먼저 있었던 것으로부터 달라지는 것도 일어나는 일이다.
수학에서 1 더하기 1은 2가 된다. 그와 달리 일 더하기 일은 다시 일이 된다. 일에서 일을 빼도 일이 되고, 일에 무슨 짓을 하든간에 일어나는 일이 된다.
수학은 추상적이고 단순한 약속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일은 출발부터 단순하지 않고 조금만 더해가도 점점 더 뒤엉키면서 복잡해진다. 한 가지 일이 끝나도 다른 일이 다시 이어진다.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단순하지도 않고, 시작도 모르고, 끝나지도 않고, 경계가 모호하고, 변덕스럽다.
그렇지만 복잡하고 다양한 일들에도 공통되는 규칙이 있을 수 있다. 일들이 서로 이어지고 달라지면서 계속된다는 규칙처럼.
생성이 일어나는 과정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드러나는 것은 생성이 만든 차이이지 생성의 활동 자체가 아니다. 그래서 베르그송은 '지속'하는 생생함을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표현할 수 없다고 했다.
그의 주장처럼 변화무쌍한 생성을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는 것은 무모한 도전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우리가 '생성', '지속'에 대해서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알아야 그렇게 부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생성'이라는 말을 통해서 관심을 갖고 다시 질문하기 위해서 이름을 짓고 부른다.
여기에서는 앞으로 '일'이라는 이름으로 생성을 부르고 질문하려 한다. 생성에 대한 여러 이름들이 있었다. '연기' '기' '사건' '지속' '무' ... 이중 어떤 이름을 선택한다고 해도 안될 것은 없다. 그러나 '일'을 선택한 이유는 우리 삶에 밀접하고 유연하기 때문이다.
다른 이름을 쓴다면 더 많은 수식어가 필요하고, 중간에 만난 사람에게는 처음부터 다시 설명해야 할지도 모르지만, '일'은 우리가 항상 쓰고 있는 '일'이라는 말을 가장 넓은 범위로 생각하면 된다.
적당한 철학적 개념을 일상적인 말에서 쉽게 찾을 수 있었다는 것은 다행히도 우리 생각과 삶에 '일어나는 일'이라는 개념이 스며들어 있음을 의미할 것이다.
노자가 말하는 '무'는 무엇일까요? 보이거나 만져지지 않으면서 기능성과 활동력은 있는 거예요. 즉 경계에 있지만 그것 자체의 실재적 존재성은 없어요. 그런데 그것 때문에 일이 일어나고 만물이 제대로 생기고 작동하는 거예요... 문도 마찬가지예요. 구체적인 문짝은 있지만, 저 문은 없는 것이에요. 문은 안과 밖의 '사이'로만 있거든요...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세계를 '무'라 하고, 보이고 만져지는 세계를 '유'라고 한 거예요. '무'는 마치 시작이나 출발이나 현재처럼 자신의 실재적 존재성은 감추고 있지만, 이 세계를 드러나게 해주는 적극적인 역할을 하지요. 노자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는 이 세계가 '무'와 '유'의 상호의존으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무상생'이에요.*
* 최진석, <나 홀로 읽는 도덕경> 68~69쪽에서 발췌, 시공사,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