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듣는 것 밖에 진리가 따로 없으니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 성철 - *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우리에게는 성철 스님이 전해서 널리 알려졌는데, 원래는 당나라의 선승 청원유신의 선시 구절이다.
이 말은 너무나 당연해서 혹시 "산이 산이 아닐 수 있을까?" 생각해 보게 만든다. 그리고 노자의 방식으로 바꿔서 "산을 산이라고 하면 진정한 산이 아니다"라는 말이 떠오르기도 한다.
영국의 산악인 조지 말로리는 에베레스트를 오르려고 하는 이유에 대해 "산이 거기에 있으니까"라는 유명한 대답을 남겼다.
산은 분명 거기에 그렇게 있다. 그러나 멀리서 바라보는 에베레스트와 직접 등반하는 에베레스트는 같은 산이 아니기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 오르고자 했을 것이다.
현실의 가장 큰 특징은 그것이 뚜렷하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현실도 일어나는 일이라고 했을 때 '바로 거기에 그렇게' 일어난다. 현실에서 이것은 이것이고 저것은 저것으로 보인다.
이 뚜렷함이 전혀 없다면 에베레스트는 멀리서 볼 수 있거나 가까이 오를 수 있지 않을 것이다. 에베레스트는 거기에 그렇게 우뚝 솟아 있는 산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누구도 같은 에베레스트를 경험하지 않는다.
사진이나 전해들은 이야기로 경험하는 사람들도 있고, 멀리서라도 직접 본 사람들도 있고, 가볍게 등산을 하는 사람들도 있고, 목숨을 걸고 정상까지 도전하는 사람들도 있다.
계절 시간 날씨에 따라서도 에베레스트는 조금씩 다른 산이 된다.
에베레스트에 있는 어떤 바위나 한 줌의 흙에게 에베레스트는 어떤 의미일까?
정작 그들에게 하나의 산으로서의 에베레스트는 지나가는 바람보다도 먼 존재일지 모른다.
우뚝 솟아 있는 하나의 산은 멀리서 바라봤을 때나 뚜렷하게 경험할 수 있다.
산에 가까이 갈수록 산을 하나의 산으로 경험하기는 더 어렵다.
우리는 에베레스트를 하나의 산으로 거기에 그렇게 있는 것으로 여기기 쉽지만,
하나의 에베레스트는 '어디에도 어떻게도' 있지 않다.
대신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방식대로 에레베스트를 만나고 겪는 일들이 있을 뿐이다. 현실의 뚜렷함은 하나의 존재로서의 뚜렷함이 아니라 일의 결과로서 잠시 '거기에 그렇게' 나타난다.
에베레스트의 뚜렷함은 멀리서 바라본 높고 웅장한 뚜렷함, 정상이 가까운 등반가의 발자국과 호흡곤란의 뚜렷함, 눈보라를 맞는 생물들의 혹독한 뚜렷함, 흔들리는 땅을 지탱하는 바위의 뚜렷함이다.
노승이 30년 전 아직 참선을 하지 않을 때
산을 보면 산이었고, 물을 보면 물이었다.
나중에 선지식을 직접 배우고 깨달은 바가 있은 다음에
산을 보니 산이 아니었고, 물을 보니 물이 아니었다.
마음 쉴 곳을 얻은 지금에 이르러
다시 산을 보니 단지 산이고, 물을 보니 단지 물이더라.
이보게들, 이 세 견해가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성철, 대한불교조계종 제7대 종정 취임 법문 중에서, 1981.
** 청원유신, <속전등록> 제22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