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바뀜이 도의 움직임이고, 약해짐이 도의 쓰임이다. 천하만물은 있음에서 생기고, 있음는 없음에서 생긴다. - 노자 (제40장) -
사라지지 않고 머물 수 있는 능력으로 보자면 단단한 돌맹이는 살아있는 생명체보다 훨씬 더 유리하다. 3만 년이 넘은 돌도끼 유물이 아직까지 형체를 유지하면서 발견되기도 한다.
그 옛날 그것을 만들고 사용했던 사람은 길어야 100년 정도 살았겠지만, 돌도끼는 아직까지 뚜렷하게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그렇게 남는 것이 살아가는 이유는 아니다.
고대 로마의 도시 폼페이에서는 갑작스러운 화산 폭발로 인해 사람들도 화산재 속에 돌처럼 굳은 채로 발견되어 안타까운 마음이 들게 한다.
잘 다듬어서 쓰던 돌도끼는 선사시대 어떤 사람에게는 요긴하게 쓰인 도구였을 것이고, 흙 더미 속에서 그것을 다시 발견한 고고학자에게도 돌도끼는 특별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운이 좋았다면 고고학자는 돌도끼 주인의 뼈조각을 함께 발견했을 것이다. 비록 뚜렷하게 남겨진 것은 돌과 뼈이지만, 우리가 그것들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그것들에 남겨진 선사시대 사람의 흔적 때문이다.
그의 삶은 뚜렷함을 잃었지만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흔적들을 통해 희미하게 남아 있다가, 새로운 만남을 통해 다시 새로운 뚜렷함을 만든다. 뚜렷함과 뚜렷함 사이에는 희미함 속의 만남이 있다.
지나간 일만 희미하게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의 일도 희미하게 다가오고 있다.
살아가는 데에 중요하게 닥치는 문제는 이로운 것과 해로운 것을 판단하는 것이다. 삶은 구분과 선택의 연속이다.
문제는 어떤 것이 이롭고 어떤 것이 해로운지 뚜렷하지 않을 때가 많다는 것이다. 선택은 지금의 현실에서 뚜렷하게 해야 하지만, 이로움과 해로움은 다가올 미래에 뚜렷해진다.
그래서 생명체는 현실의 뚜렷함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 중요한 문제들은 지금은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어느 순간 뚜렷한 현실로 우리 앞에 들이닥치게 된다.
돌은 왠만한 자극과의 마주침에는 끄떡없이 자신의 형태를 지킬 수 있게 준비되어 있다. 우리는 돌처럼 오래 남을 수는 없지만, 희미한 실마리를 활용해서 자신을 지키고 살아간다.
우리가 당장 눈앞에 있는 뚜렷함이 아닌 다가올 수도 있는 일들에 대해 배우거나 호기심을 갖는 것은 뚜렷한 현실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함이다. 그런 준비들은 평소에는 희미하게 남아 있지만, 특별한 마주침에서 뚜렷하게 다시 일어난다.
그래서 선사시대인은 돌맹이에서 희미한 돌도끼의 모습을 볼 수 있었고, 고고학자는 돌도끼에서 희미한 선사시대인의 흔적을 볼 수 있었다.
고고학자는 일반인들이 지나치고 관심을 두지 않는 토기편 한 점을 발견할 때 작지만 소소한 행복을 느끼는 사람들입니다. 고고학의 매력은 어디 있을까요? 저는 바로 유물을 통해 죽어 있는 과거에 새로운 삶을 부여하는 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의 그들도 우리와 똑같이 희로애락을 느끼면서 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숨결을 직접 느끼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고고학이 찾아내는 과거 사람들의 모습은 차가운 유물뿐이기 때문입니다. 눈으로만 봐서는 절대 그 진실에 가까이 갈 수 없습니다. 유물에 숨어 있는 이야기, 아주 오래 전 그들이 살았던 모습을 상상하고 느낄 수 있을 때, 그들이 단순한 유물이 아닌 우리와 전연 다를 것 없었던 사람들인 걸 알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