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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기담은 철학 May 19. 2023

길 하나. 시와 철학


나의 시가 나무와 새와 풀과 벌레의 가슴을 적셔주는 밥이 되려면 한참 멀다
 - 김순일 -



스무고개 놀이가 있다. 처음 몇 고개에서는 무엇에 대한 설명인지 알쏭달쏭하지만, 그렇게 한 고개 한 고개 넘다 보면 점점 답에 가까워진다. 여기에서는 답이 정해지지 않은 스무고개 놀이를 하려고 한다. 고갯길들을 걸으면서 우리에게 필요한 질문과 대답을 찾아갈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놀이가 시작된다. 때로는 막다른 길에 이르러 새로운 통로를 만들면서 가는 모험이 될 것이다. 때로는 엉뚱한 길에 들어서 되돌아가야 할 수도 있다. 지나온 길의 기억들이 다리에 쌓이면서 질문도 답도 찾아갈 수 있지 않을까.



제주 섭지코지


아기가 옹알이를 한다. 단 한 번 밖에 들을 수 없는 비밀의 노래처럼 한 마디도 놓칠 수 없어 귀를 쫑긋하게 한다. 소리 내기인지 말인지 노래인지 알쏭달쏭한 옹알이를 들으며 즐거운 상상을 더한다. 옹알이를 통해 아기는 시인이 되고 천사가 되고 철학자가 된다. 나도 따라 옹알이를 흉내 내면서 아기와 서로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해본다. 사실 대화 내용이 어떤 것이냐는 별 상관이 없다. 아기와 서로 주고받는 느낌 그 자체가 의미가 되니까.  


막연한 생각을 어떻게 말로 표현해야 할지 어려움을 느낄 때가 많다. 시집이나 철학책을 읽을 때, 그리고 시적인 표현이나 철학적인 글을 쓸 때 언어의 혼란을 겪는다. 생각이 혼란스러울 때 일단 나오는 대로 두서없이 적어보면, 아기의 옹알이처럼 알쏭달쏭한 글이 나온다. 아기가 옹알이할 때 무슨 말이 하고 싶은지 아니면 그냥 소리 내는 것이 재미있는 건지 알 수 없지만 어떤 많은 말들보다도 더 의미 있는 언어로 다가온다. 시와 철학도 이런 옹알이들에서 출발한다. 옹알이들이 만들어지고 말이 되어 가는 도약들이 쌓이면서 한 편의 시와 철학이 되어 간다. 또 옹알이처럼 들리던 시와 철학이 어떤 의미가 되어 다가오는 도약의 순간들이 있다.

  

처음부터 확실하고 습관적으로 다가오는 말들은 새로운 시, 새로운 철학이 되지 않는다. 시와 철학은 표현하기 힘든 것을 말에 담으려 한다. 그래서 뚜렷하지 않은 생각들과 느낌들을 더듬거리며 말의 모양을 만들어 간다. 시인과 철학자는 두 가지 지점을 통과한다. 먼저 모호하지만 새로운 생각들의 영역을 탐색한다. 그리고 그 모호한 느낌들을 적당한 말로 표현될 수 있도록 선택하고 잡아두려 한다. 출발은 같이 했지만 시와 철학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간다. 시는 말을 잡아서 다시 자유롭게 놓아주고, 철학은 잡은 말을 다른 말들과 단단하게 이어간다. 그래서 시는 말들이 뛰어노는 자유로운 노래를 들려주고, 철학은 말들을 엮은 그럴듯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하지만 <노자>에서 볼 수 있듯이 시와 철학이 각자의 길을 가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시에는 삶에 대한 통찰이 필요하고, 철학에는 자유로운 상상이 필요하다.





              까칠한 모음과 자음이 *


                                                            김순일 

까칠한 모음과 자음이 머리속에 시의 거푸집을 짓는다

저녁이면 바람나서 나갔던 시의 엉덩이가 펑퍼짐한 말떼
를 데리고 돌아와 쿨쿨 잔다

황소 같은 파도가 몰려와 시의 볼기짝을 찰싹 찰싹 때린다


소금물의 새벽은 감감하다

모래알처럼 뒹구는 모음과 자음의 쭉정이를 아무도 거들
떠보지 않는다


그래도 그 쭉정이가 너섬의 둥근 지붕 그늘에서 음습하게 
자란 말떼보다는 시장바닥 사람들의 땀내에 가까이 있다


나의 시가

나무와 새와 풀과 벌레의 가슴을 적셔주는 밥이 되려면 
한참 멀다



"철학은 시와 유사하다. 이들은 모두 우리가 문명이라 부르는 궁극적인 양식을 표현하고자 한다. 이 양자 모두에는 낱말의 직접적인 의미를 넘어서고 있는 형식과의 관련이 존재한다. 시는 운율과 제휴하고 철학은 수학적인 패턴과 제휴한다."** 



* 김순일 시집 <두 그루의 가시나무> 71쪽, 지혜, 2019.
** 화이트헤드, 오영환 문창옥 옮김, <사고의 양태> 330쪽, 치우,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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