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Cogito, ergo sum.
- 데카르트 -
퇴근 시간을 기다리거나 주말을 기다리는 것은 그 시점을 지나면서 일의 내용이 바뀌기 때문이다. 일은 끝없이 이어지지만 일의 내용에는 시작과 끝이 있다.
일은 한편으로는 이어져 있고 한편으로는 나눠져 있기 때문에, 일을 어떤 단위로 묶을 것인지는 각자의 기준에 따라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퇴근 후에도 직장 일을 계속 생각하고 있다면 퇴근한 건지 안 한 건지 헷갈릴 것이다. 같은 일이라도 어떤 기준이냐에 따라 묶음의 안이 될 수도 있고 묶음의 바깥이 될 수도 있다.
한 사람의 인생과 하루 일과도 여러 일들이 공존하는 모임이다. 아주 사적인 영역이라고 생각하기 쉬운 나의 의식에는 몸의 바깥에 대한 정보들이 넘쳐난다.
사실 내 안에도 내 의식의 접근하지 못하는 영역들이 많이 있다. 그런 영역들은 내 안이라고 불러야 할지 내 밖이라고 불러야 할지 애매하다.
일들의 시작과 끝, 안과 밖의 경계는 모호하다. 그렇지만 일들은 기준에 따라 나눠보고 묶어볼 수 있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아무리 모든 것을 의심해도 의심하는 내가 있다는 것 만큼은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생각하는 일을 할 수 있고 '생각하는 일'로 묶어서 볼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존재하는 일'을 하고 있고 '존재하는 일'로 묶어 볼 수 있다.
여기서 두 개의 다른 일의 묶음이 생긴 것은 묶음의 기준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생각하는 일'에서 '존재하는 일'의 사이에는 의심해야 하는 기준의 변화가 있다.
'존재하는 일'은 '생각하는 일'을 포함한 더 넓은 범위로 일을 묶은 것이다. 일반화해서 표현하자면 a라는 일이 일어났는데 a 혼자서 일어날 수는 없으므로(고로), A라고 하는 바탕이 되는 일 속에서 a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데카르트의 추리 과정은 옳다. 어떤 일은 다른 일과의 연관 속에서 일어난다.
그래서 데카르트의 말은 그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겉잡을 수 없이 확장될 수 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고로 세계는 존재한다."
일의 경계는 날카로운 의심의 칼날로도 자를 수 없게 엮여 있고 다시 엮인다.
아주 단순하고 확고해 보이는 일에도 온 세계가 직간접적으로 엮여 있다.
그래서 일을 나누는 기준은 임시방편적인 것이다.
우리 감각들이 가끔 우리를 속이기 때문에, 나는 그것들이 우리에게 상상하게 하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가정하고자 했다. 그리고 심지어 기하학의 가장 단순한 문제들에 관해서도, 추리를 할 때 착각하는 사람들이, 또 거기서 오류추리들을 범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나도 다른 누구만큼 과오를 범할 수 있다고 판단하면서, 내가 전에 증명들로 간주한 모든 근거들을 거짓으로 던져버렸다. 그리고 끝으로, 우리가 깨어서 가지는 것과 똑같은 모든 사유들이, 자는 동안에도, 우리에게 떠오를 수 있다는 것을, 그렇지만 이런 경우에 참인 것은 하나도 없음을 고찰하면서, 일찍이 내 정신에 들어와 있는 모든 것들이 내 꿈의 환상들보다 더 참인 것은 아니라고 가상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바로 뒤에, 내가 그렇게 모든 것은 거짓이라고 사유하고자 하는 동안, 그것을 사유하는 나는 필연적으로 어떤 것이어야 한다는 것에 주의했다. 그리고 나는 사유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이 진리는 너무나 확고하고 너무나 확실해서, 회의주의자들의 가장 과도한 모든 억측들도 흔들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면서, 나는 그것을 주저 없이 내가 찾고 있던 철학의 제일원리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
* 데카르트, 이현복 옮김, <방법서설> 54~55쪽, 문예출판사,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