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한 편의 마지막은 다음 이야기를 궁금하게 만들며 끝난다. 시청자들은 아쉬움을 달래며 가능한 이야기들을 상상하면서 다음 편을 기다린다.
스포츠 경기에서는 현실 이야기와 꾸며낸 이야기 사이를 오가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펼쳐진다. '축구공이 골대 안으로 들어가면 점수가 생긴다'는 꾸며낸 이야기다. 관심없는 사람에게는 공이 어디로 가든 무슨 상관이 있을까? 그러나 메시의 놀랄만한 연봉처럼 꾸며낸 이야기는 현실과 뒤섞인다.
연극에서는 결말이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래서 같은 연극을 수없이 반복할 수 있다. 연극에서 매회마다 똑같은 이야기가 특별해지는 것은 현실과 맞닿아 있어서가 아닐까?
무대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는 가상이지만 동시에 현실이다. 연극을 보고 있으면 가상과 현실이 맞닿아 진행되는 상황에서 묘한 매력을 느끼게 된다.
연극을 소재로 한 영화 <버드맨>은 온갖 일과 이야기들이 뒤섞여 있다. 과거와 현재, 영화와 연극, 사실과 뉴스, 의지와 우연, 현실과 망상, 꿈과 이상의 이야기들이 한 흐름으로 이어지면서 관객까지 그 속으로 끌어들인다.
<버드맨>은 거의 모든 장면이 한번에 촬영한 것처럼 이어져 있는데, 감독 알레한드로 이냐리투는 이에 대해 편집 불가능한 삶의 의미를 담고 싶어서 그렇게 만들었다고 한다.
이어지고 달라지는 세계는 끊임없이 현실의 일과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지나간 일을 기록하고 상상의 이야기를 만드는 것도 현실의 일부가 된다.
현재의 일의 결정을 과거의 경험에 따르거나 아직 일어나지 않은 가상에 따라서 하는 것은 삶에서 항상 있는 일이다.
먹이를 찾는다거나 위험을 피하고 대비하는 일들은 지나간 과거를 참고해서 오지 않은 미래를 시도하는 것이다.
지나간 일과 미래의 일과 상상의 일은 가상의 이야기로 지금의 일에 개입한다. 그리고 지금의 일은 다시 이야기를 남긴다.
지나간 일은 경험과 역사의 이야기로, 미래의 일은 예상과 계획의 이야기로, 상상의 일은 꾸며낸 이야기로 현실과 함께 일한다.
그렇게 가상과 현실, 과거 현재 미래는 일과 이야기를 통해 이어지고 수시로 자리를 바꾼다.
시간이 과거에서 미래로 가는 것은 맞지만 직선처럼 가지런히 가지는 않는다.
"시간의 축은 빗장이 풀려 있다." ... 빗장이 풀린 시간은 미친 시간을 의미한다. 그것은 신이 부여했던 만곡에서 벗어난 시간, 지나치게 단순한 원환적 형태로부터 풀려난 시간, 자신의 내용을 이루던 사건들에서 해방된 시간, 운동과 맺었던 관계를 전복하는 시간, 요컨대 자신이 텅 빈 순수한 형식임을 발견하는 시간이다. 이때는 결코 어떤 것도 시간 안에서 펼쳐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 대신 시간 자체가 스스로 자신을 펼쳐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