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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기담은 철학 Jul 25. 2023

스물세번째 길. 이야기할 수 있는 자유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을 사용하다 보면 설정 변경이나 본인인증 등의 번거로운 절차를 더듬더듬 따라가다가 갑자기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는 상황을 종종 겪는다. "아오, 이걸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나..."

그렇지만 한번 해봤다고 멈춘 지점까지 다시 가기까지는 훨씬 빨리 하게 된다.

지나온 경험이 안내자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일이 진행하면서 여러 이야기들이 함께 생긴다.

A가 B로 된 일에서, B라는 결과 뿐만 아니라 'A가 B가 된 이야기'라든지  'A가 B가 되어 좋다'라든지 'A가 C가 되지 못한 이야기'라든지 여분의 결과들이 생긴다.
구체적인 결과 B는 뚜렷한 현실의 결과로 다음 일로 진행한다. 어떤 음식을 선택해서 먹었으면 소화 흡수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런데 나머지 결과들은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한 이야기로 현실에서 한 발짝 벗어나게 된다.

일과 이야기의 차이는 여기에서 발생한다.


원래 일의 시도는 이야기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어떻게 진행할지 아직 확정되지 않은 채 번져 나아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때는 곧바로 실행될 수 있는 일 속의 이야기이다.

반면 일에서 분리된 이야기는 그 자체만으로는 구체적인 결과를 도출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야기라는 일은 발생한 조건이 갖춰질때 다시 일어나거나(숙련됨, 습관, 기억, 예상 등)

때로는 욕구, 윤리, 계획처럼 발생한 조건을 일으키도록 일한다.


이야기는 작동하기 위한 조건이 필요하다는 결점이 있는 대신 현실의 휩쓸림에서 벗어나는 자유를 얻는다.

이야기는 현실에서 추상된 가상의 성격을 갖게 되어 현실보다 더 자유롭게 연결되고 변형될 수 있다.

그리고 추상에 추상을 거듭하면서 현실과는 동떨어진 상상이나 이상을 만드는 일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야기는 구체적인 일의 시도에 내재되어 있는 성격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세계는 스스로를 벗어날 수 있는 자유를 스스로 만든다고 할 수 있다.




      청포도

                                     이육사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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