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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기담은 철학 Jul 19. 2023

스물두번째 길. 리듬의 변주

기억에선 지워져도 남는 게 있어
말을 하지 않아도 쓰여진 게 있어
- 온유 '써클' 중 - 



돌의 뚜렷한 형태는 쉽게 사라지지 않지만 영원히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돌은 형태를 지킬 준비만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형태를 바꾸는 일도 같이 시도되고 있다. 어떤 시도가 작동하게 될지는 새로운 만남을 통해 결정된다. 예를 들어 망치질과의 만남처럼.

 

돌과 같은 물체에서 시도와 결과의 리듬은 알아채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일어난다. 

물체는 보통 뚜렷한 결과, 희미한 시도, 만남, 다시 뚜렷한 결과 사이를 진동한다. 

그 만남과 진동의 단조로움과 빠름으로 인해 그대로 머물러 있어 보이는 특징을 갖게 된다. 그러나 뚜렷한 결과가 지속되는 존재는 없다. 머물러 보이는 현실은 반복된 시도와 결과다.  


우리는 세계의 확고한 기초(실체)에 대해 착각하기 쉽다.

세계가 일어나는 일들의 모임이라고 했을때, 일이 곧 세계의 확고한 기초가 된다.

일이 일어나는 시공간이나, 일하는 물질이나 생명체 같은 것들은 착각이다.

반대로 시공간과 물질과 생명체는 일이라는 확고한 바탕에서 형성된다.

그래서 실체는 아이러니하게도 역동적인 리듬을 갖는 일들이다.


일이 실체로서 기능을 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 있다.

일의 진행은 앞서 일어난 일들을 기초로 일어난다는 것, 지금 일어나는 일들도 다음 일들을 위해 쓰여야 한다는 것이다.

어찌보면 당연한 말로 보이겠지만 있지만, 우리는 그동안 이 조건에 대해 철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지난 길에서 예를 들었던 물냉면과 비빔냉면 사이의 어려운 선택을 다시 떠올려보자.

드러나는 일의 진행은 냉면식당 도착 ㅡ> 물냉면 주문 ㅡ> 물냉면 먹기 ㅡ> 식당에서 나오기 로 진행된다. 

꿈에서처럼 냉면을 먹다가 갑자기 수영을 한다거나 수업을 듣고 있다거나 하지 않고, 앞선 일들을 기초로 일이 진행된다. 일의 실체성은 잘 기능하고 있는 것일까?

그런데 물냉면과 비빔냉면 사이에서 갈등했던 일, 비빔냉면을 먹지 못한 아쉬움, 물냉면의 시원함은 어떻게 될까? 


비빔냉면 먹기는 시도되었다. 그 일은 김치찌개 먹기보다 '훨씬' 실현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뚜렷한 결과를 맺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물냉면의 뚜렷했던 시원함도 점점 희미하게 사라져 간다. 

일의 시도는 물체처럼 바로바로 결과를 다시 드러내는 경우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당장 드러나지 않더라도 긴 리듬으로 진행되는 시도들이 있다.

그래서 어떤 경험이 잊혀졌다가 갑자기 기억으로 떠오르기도 하고, 오랜기간 반복된 훈련이 숙달된 순간의 기술로 나타나기도 한다.

비빔냉면 먹기와 물냉면의 시원함은 아직 남아서 새로운 일을 시도하고 있다. 아쉬움과 시원함이 다시 냉면 식당을 향하게 할 것이다.




영원히 태양 바람 구름 비와 바다로

봄과 여름 가을 겨울 사이로

만남 이별 모두 다른 적 없는

파도 위에 우린 함께 흘러가고

...

기억에선 지워져도

남는 게 있어

나 어릴 적에 꿈꿔왔던

초록빛 세상처럼

말을 하지 않아도

쓰여진 게 있어

별다른 이유 없이

사랑해 준 마음들*



* 김이나 작사, Harris 작곡, 온유 노래, '써클' 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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