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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기담은 철학 Jul 17. 2023

스물한번째 길. 이야기가 필요한 순간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 정현종 <방문객> 중 -



어느 더운 여름날 점심으로 냉면을 먹으러 근처 냉면 전문 식당에 간다. 이 식당의 대표 메뉴는 단연 물냉면과 비빔냉면이다. 둘 다 좋아하기 때문에 이번엔 어떤 쪽을 선택할지 짧지만 어려운 고민을 한다. 

"그래, 날씨가 더우니까지 시원한 물냉면을 먹자." 그런데 막상 주문을 하고 나니 비빔냉면도 먹고 싶다는 생각이 다시 든다. "내일 다시 와서 비빔냉면 먹어야겠다." 이렇게 다짐하면서 아쉬움을 달랜다. 

드디어 물냉면이 나오고 소스를 적당히 넣어서 한 젓가락 먹은 후에 그릇을 들어서 국물도 시원하게 마신다. 

"역시 더울 때는 시원한 물냉면이 최고네! 내일도 다시 물냉을 먹을까? 벌써부터 고민돼네." 이런 즐거운 고민을 하면서 한 그릇을 다 비운다. 


이번 점심 식사의 진행을 객관적인 사실들로 정리하자면, '점심시간이 되어서 냉면식당에 갔고 물냉면을 먹고 나서 돌아왔고 소화시키고 있다'처럼 짧게 말할 수 있다. 

이렇게 확실한 일의 결과들만 있다면 일의 진행은 상당히 단순하게 여겨질 것이다. 물냉면이든 비빔냉면이든 김밥이든 메뉴가 바뀐다고 해도 별다른 문제가 없고 고민할 이유도 없어 보인다. 

점심 메뉴를 정할 때 물냉면과 비빔냉면 사이에서 얼마나 고민스러웠는지, 물냉면의 국물이 얼마나 시원했는지, 이번 일이 다음 점심 식사 때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지 같은 이야기들은 나에게는 매우 중요한 일이지만 바깥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일어나는 일들이 남기는 결과들에서 놓치기 쉬운 결과들이 있다.

A가 B가 되고, B가 C가 되고, C가 D가 되는 식으로 일들이 일어난다면 생명체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햇빛은 내리쪼였다가 없어지고, 온도는 올랐다 내려가고, 분자들은 모였다가 흩어지고, 운동은 움직였다가 멈춘다. 

햇빛이 쪼였을때 있었던 일들, 온도가 변하면서 있었던 일들, 분자들이 모이면서 있었던 일들이 그냥 순차적으로 진행되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남아서 다음 일에 영향을 끼쳐야 그것을 활용할 수 있는 생명체들이 만들어지고 살아갈 수 있다. 

뇌신경의 전기화학적 신호들을 아무리 따라다녀봐야 물냉면의 시원함과 그 기억이 나오지 않는다. 짚신벌레의 분자들을 아무리 따라다녀봐도 먹이와 위험에 대한 호불호가 나오지 않는다.


우리는 앞에서(첫번째~네번째 길) 철학을 '삶과 세계의 이야기를 엮어서 활용하는' 일로 정의했고, 동물들의 본능적인 철학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욕구나 기억같은 동물들의 특별한 능력들은 이야기의 형태로 만들어지고 남아있다가 현재 일어나는 일에 쓰인다. 물냉면의 시원한 맛, 비빔냉면에 대한 아쉬움은 이번 점심에 강렬하게 남아서 다음 점심에 쓰일 것이다. 


일어나는 순간에는 이야기가 필요하다. 이야기는 일이 진행되면서 같이 만들어지고 다음 일에 쓰인다.

이야기가 개별적으로 남으면 기억이 되고, 합쳐지면 출처를 알기 힘든 습관이나 본능이 된다.

이야기를 엮어서 쓰는 본능적인 철학은 본능의 일부가 아니라 전부다.  

생명체는 일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이야기로 엮어서 활용하는 일의 모임이다. 




           방문객 

                                 정현종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ㅡ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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