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기 때문에 저것이 일어난다.
- 잡아함경 -
교통과 통신의 발달은 점점 더 넓은 지역을 하나의 생활권으로 만들고 있다.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다. 가짜 사진 한 장에 세계의 주식 가격이 출렁거릴 수 있다. 극단적으로 브라질에 있는 어떤 나비의 날개짓이 미국 텍사스에 토네이도를 일으킬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비효과는 극단적인 이론이 아니었다. 지구 한편에서 발생한 돌연변이 바이러스가 지구인의 삶의 방식을 바꾸는 데는 6개월도 채 걸리지 않았다.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지구 전체가 가까이 이어져 있음을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보여주었다. 세계에는 여러 존재들이 만들어내는 여러 일들이 있지만, 그것들은 서로 얽히고 섥혀서 하나의 세계를 만든다.
세계가 하나라면 내가 곧 세계이기 때문에 세계라는 말이 따로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모든 말이 필요하지 않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으니까. 세계가 하나라면 타인을 신경 쓸 일도 없고, 미래를 걱정할 필요도 없고 어떤 새로운 일이 일어날 이유가 없다.
반대로 세계가 여럿이라면 세계는 나와 별개의 것들이기 때문에 알 수도 없고, 마주칠 일도 없고, 어떤 말 어떤 짓을 해도 소용 없을 것이다.
결국 하나인 세계와 여럿인 세계는 똑같이 무의미해진다. 세계가 세계일 수 있는 이유는 하나도 아니고 여럿도 아니기 때문이다. 바꿔 말해서 하나이기도 하면서 여럿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세계가 하나이면서 여럿인 역설적인 상황이야말로 존재하는 모든 것에 주어진 실존적인 상황이다. 나는 언제나 세계와 같아지지도 않고, 세계와 떨어지지도 않은 상황에 있다.
만약 우리가 신이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가 있다고 해도 그 역시 마찬가지다. 신이 세계와 같다면 그런 신은 없게 된다. 신이 세계와 다르기만 해서는 신으로 작용할 수 없기에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들뢰즈의 일의성의 존재론은 니체적 코페르니쿠스적 혁명 ... 양태들의 반복되는 생성, 즉 영원회귀 자체를 존재로 이해하는 것이다... 회귀하는 것은 존재이긴 하지만 오직 생성이라는 존재이다... 차이에 의해 생산되는 그런 동일성은 반복으로 규정된다. 종래에는 양태로서의 개별적인 존재자들의 생성은 동일성의 원천으로서의 존재에 의존했다. 그러나 니체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은 그것을 거꾸로 세운다. 양태들의 생성이 실체적인 존재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존재가 생성에 의존한다... 모든 것이 되돌아온다는 것은 생성의 세계와 존재의 세계를 최고로 화해시키는 것이다.*
*서동욱, <들뢰즈의 철학> 123~124쪽에서 발췌, 민음사, 2002.